1912년, 우츠기 란기리
9월 13일
결국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예상이야 했지만 독일이나 에어체룽그와 비교하면 이곳은 완전히―엉망이다. 의료 시설이나 교육 시설은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되고 저잣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들도 소음에 불과하다. 전쟁, 통일, 민족주의, 비명, 혼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은 그저 뒤따라왔을 따름이고 문제는 나 스스로가 작금의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란 것을. 엉망진창인 것은 내 조국은 물론이고 독일이나 에어체룽그도 마찬가지다. 내가 짐을 풀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호텔은 안락하고 이곳의 고용인들은 모두 친절하다. 불만의 화살을 애꿎은 그들에게 돌릴 필요는 없지.
곳곳의 유력가들과 안면을 트는 일도 중요한 용무라고는 하나 갑작스럽게 잡힌 이 일정 하나 때문에 대체 몇 개의 수술과 미팅이 취소되었는지 셀 수도 없다. 만 이틀 동안의 이동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늘만 대체 몇 명의 사람들에게 인사했던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마주하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얼요. 재미있다는 듯 예의 바르게 소리 내어 웃고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슬쩍 흔들기. 익숙하다 못해 질릴 대로 질린 일들.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은 고작 이 주일밖에 되지 않지만 앞으로의 13일도 오늘과 같은 일들 뿐이라면 ‘무려 이 주일’이 될 판이다. 그나마 매일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꿈결 같은 기대라도 품고 여가 시간의 계획이나 세워보면 조금쯤은 무료함이 달래질까.
생각해보면 에어체룽그로 유학을 온 지도 벌써 오 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그동안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셈이다. 나고야에 있을 때는 언제고 볼 수 있었던 것이 바다고, 그 내음 또한 언제고 맡을 수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 해안가가 있다고 하니 오랜만에 바다를 보러 가는 것도 괜찮은 기분 전환이 될지 모른다.
어쨌든 내일은 내일의 축복이 따르기를 바라며, 부디 조금이라도 덜 지루한 하루가 되기를.
9월 14일
……라는 기원이 무색하게 오늘도 온종일 이곳저곳에 불려 다녔다. 당장 조금 전까지 아버님의 지인부터 랜들 선생의 지인까지 손님 응대로 하루 24시간을 빠듯하게 채웠지만―이 사적인 지면을 빌려 솔직히 말하건대―그간 만난 수많은 사람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저 멀리 일본에서 독일, 에어체룽그, 이탈리아까지 떠나왔음에도 어쩜 이렇게까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수가 있는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똑같은 것만 같다. 답답한 마음에 호텔 근처의 해안가를 산보하니 조금쯤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방책일 뿐임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움켜쥐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도 온전히 편안해질 수 없다.
무언가가 나를 몰아세우고 있다. 나로서는 그 무엇의 정체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암흑 속을 내달리며 누군가를 갈구하듯 찾아 나서고 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 나는 그를 갈망한다. 그는 나를 이해하고, 나는 그를 이해하며, 우리들은 함께 꿈을 꾼다. 서로의 이상을 이야기하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살아간다. 나는 그의 곁에서 충족감을 느낀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눈을 뜨면 나는 혼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는 듯했던 그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제대로 기억해내기조차 어렵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그를 찾는 것. 그의 허울을 흉내 낼 뿐이더라도 쉬이 거부하지는 못 하리라. 이 생生을 움켜쥐고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9월 15일
조식과 중식은 괜찮았지만 석식으로 먹은 샥슈카는 최악이었다.
중심가에 위치한 몇몇 의약대학과 약제소에 들렀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다만 이번 주차 란셋에 게재된 공중위생에 대한 논문은 제법 신선하여 흥미로웠다. 연구소에 있었다면 동료들과 즐겁게 토론하며 이야기했을 텐데. 아쉬운 대로 내일 이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볼까. 함께 유학해 온 동창들이나 연구소의 다른 동기들만큼 만족스러운 대화 상대가 되어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지만 기분 전환용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맙소사, 결국에는 이탈리아까지 휴가를 와 놓고도 저널을 읽는 걸 유흥으로 생각하는 지경이 되어버리다니! 기가 차다 못해 깔깔 웃었다. 지금 내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설사 그렇더라도 할 말은 없지!
9월 16일
어제 만난 의대생들과 논문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했지만 그쪽은 영어가, 나는 이탈리아어가 서툴러서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라틴어로 간단한 대화는 나눌 수 있겠으나 그걸로 논문 대화까지 할 바에야 차라리 묵언 수행을 하는 편이 나을 테다. 그나마 호텔 로비에서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만 이 또한 끝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설마 그 번듯해 보이는 인물이 급진적 민족주의자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당연하게도 갈수록 대화가 격화되었고 결국 그가 먼저 잠시간의 무례를 사과하며 자리를 떠났다. 몇 분 후 나도 마시고 있던 칵테일을 끝까지 마시고 저 아래의 해안가로 내려갔다.
그곳은 좋은 산책 장소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도, 살갑게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딱 적당한 정도로 나를 맞이해주는 데다가 깎아지른 절벽과 탁 트인 해안, 뜨고 지는 해와 달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황홀한 절경에 비해 찾아오는 사람도 얼마 없다. 이런 장소를 발견하다니 천운이 따라주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종종 찾을 요량이다.
9월 17일
■■ ■■의 파티에 끌려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러게 그만ㅁㅏ신달고 햇ㅅ느ㄴㄷㅔ. .
9월 18일
숙취로 종일 고생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젯밤 어떻게 호텔까지 돌아와 일기(같지도 않은 일기지만)를 썼는지마저 의문이다.
어제의 일기에 짧게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관광차 살레르노에 들렀다가 우연히 친분이 있는 선배를 만나 그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 끌려갔다. 안 그래도 여행이 생각보다 따분하던 차라 적당히 분위기나 즐기고 올 생각이었건만 어느 순간부터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입에 술을 들이붓는 바람에 결국 인사불성으로 취해버렸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는데, 아마 누군가가 택시를 불러 주었으려니 짐작할 뿐이다.
하여간 그런 연유로 오늘은 내내 호텔에서 쉬다시피 했다. 야외에 테라스가 있어 그리 답답하진 않았지만 언제나처럼 따분한 하루임에는 변함이 없다.
9월 19일
내일이면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된다. 지금까지의 감상은: 끔찍하게 지루하다. 당장 옆 방에서 총성과 함께 비명소리가 들리면 조금쯤은 흥미진진해질까?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다.
9월 20일
신께서 내 바람을 들어주시기라도 했는지, 오늘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아, 어제의 일기에 이어 적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만 같군. 다행히도 휘황찬란한 파티장의 불이 돌연 꺼지고 총성과 비명이 섞여 들리다가 다시 불빛이 돌아오니 누군가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식의 탐정소설 같은 전개는 아니었다. 다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배경은 마찬가지로 파티장이라 하더라도 무리는 없겠다.
나는 오늘도 저녁 내내 이곳 호텔의 연회장에서 온갖 귀빈들께 예의를 갖추며 손등에 입 맞추고 춤을 추기를 반복할 예정이었다. 헌데 악단이 연주하는 왈츠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니 마치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양 당장 그곳을 빠져나오라는 강렬한 충동이 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무어라 따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충동에 몸을 내맡긴 채 그대로 몰래 연회장을, 나아가 호텔을 빠져나왔다. 바깥의 서늘한 바람이 뺨에 닿고서야 몽롱한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들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기거나 한심한 꼴이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 알량한 자유와 상쾌함을 만끽하며 저 아래의 해안가로 내려갔다.
그 전에, 그간 해안가를 찾으며 깨달은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우선 그곳에는 기이하리만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다. 이곳에서 5km도 떨어지지 않은 해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미어터지는데 이곳은 한두 명이 거니는 모습조차 보기 힘드니 영 기이한 노릇이다. 그나마 낮에는 나와 같은 여행객이나 연인들이 해안가를 찾는 모습이 종종 보이기도 하지만 해가 저물 즈음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그곳을 찾거나 머물지 않는다. 이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다들 당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밤에 해안가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라도 있느냔 물음에도 “그런 규율은 없지요. 딱히 물결이 거센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굳이 밤의 바다를 찾을 이유도 없지 않나요?”라는 대답만을 돌려줄 뿐이었다. 여전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막연히 이 지방의 이상야릇한 관습이리라 생각하며 저 고즈넉한 밤바다의 정경을 홀로 마음껏 누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해안가를 거닐고 있자니 저 멀리에 웬 인영이 보이는 게 아닌가. 밤의 어둠에 가려져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장신의 남성인 듯했다. 예상외의 상황에 가만히 멈춰서 눈을 끔뻑거리며 그를 지켜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그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그를 경계하는 것도 잠시,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어쩐지 이유 모를 호승심이 생겨 가까이 다가가 말을 붙였다.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리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차분하게 나와의 대화에 응했다. 가까이서 보니 뜻밖에도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동양계 청년처럼 보였는데 상당한 미남자였고, 영어가 굉장히 유창했다. 남자치고는 긴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의 단발머리에 뚜렷한 눈매, 붉은빛이 도는 눈이 다소 이국적으로 보여 혼혈인가 보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반쯤 농담 삼아 조금 전에는 왜 나를 못 본 체했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느꼈다면 유감이군요. 지난 며칠 동안 당신이 해안가를 거니는 모습을 보았기에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긴장을 거두었을 뿐입니다.”
나는 놀라 대답했다.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당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요! 대체 어디에서 날 본 거죠?”
“그렇겠지요. 밤의 바다에서 누군가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저는 주로 당신이 거니는 방향의 반대쪽에 있었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확실히 내가 내려오는 길목과는 반대 방향에 있어 그곳까지 다다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멀리에서 나를 알아보다니 대단한 시력이라고 순수하게 감탄하자 그는 작게 웃는 듯 보였다.
이후 우리는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점차 화제가 심화되며 사회적, 학문적인 영역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말하기에는 묘하게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어눌하지는 않았고, 그의 입에서 화化하는 말에 깃들어있는 통찰력이나 상상력, 재치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감각은 다른 단점을 모두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그와 대화하는 내내 나의 입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일본에서든 에어체룽그에서든,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인물을 통틀어 이다지도 뛰어난 지성을 지닌 존재는 처음이었다. 그와의 대화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시구 같았고 무엇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야속하게도 즐거운 시간은 언제보다도 빠르게 흘러가 처음 만났을 때 초저녁의 푸름을 간직하고 있던 하늘은 어느새 빛 한 줄기 허용하지 않는 새카만 한밤으로 변해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어.” 잠시 하늘 쪽을 눈짓하던 그가 말했다.
“아아,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군. 왜 즐거운 시간은 이리도 빠르게 지나가는지. 자네와 조금 더 대화하고 싶어. 혹여 나만의 즐거움이었던가?”
“그렇지는 않아. 허나 지금은 다음을 기약할 시간이지. 나는 사정상 낮에는 시간을 낼 수 없고, 밤에는 가끔 이곳을 거닐어. 내일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만나는 것은 어떨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종일 그와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내일이 되면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괜찮게 느껴졌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기도 하지. 이곳에서의 시간이 이제는 기대되다 못해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것만 같다.
참. 중요한 사실을 쓰지 않았군. 그의 이름은 하라다 무테이. 나와 같은 26세로, 서양식 이름은 Martin이라고 한다. 마르틴-보다는 마틴에 가까운 발음이었던 것 같다. 일본계 이탈리아인이냐는 질문에는 뭉뚱그린 답을 내놓았지만 적어도 일본어와 이탈리아어 모두 원어민 수준으로 능통한 것은 분명하다. 그와 나의 대화도 대부분 일어로 이루어졌으니까.
하하하! 아아, 신께 감사해야만 하겠다. 단 한 순간에 이다지도 사로잡혀 버리다니. 정말이지 이런 기연奇緣이 있나!
9월 21일
날이 밝고 눈을 뜨자마자 무테이와의 만남만을 기다렸다. 오전부터 낮까지는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이다. 로비에서 신문을 읽고, 잠시 주변의 신사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거리를 산책했던가.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시간 때우기에 불과한 일들이다. 내게 중요한 건 오직 저녁의 만남뿐이었으니까.
도저히 밤이 깊어지기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 어제보다 조금 이른 7시에 해안가로 내려갔다. 15분 정도를 걸어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어제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던 바위 위에 그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란기리. 벌써 왔네.”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자네야말로! 언제부터 와 있던 건가?” 내가 손을 내밀며 대답하자 그는 예의 옅은 미소를 짓더니 “나도 너만큼이나 저녁 산책을 즐겨서 말이야.”라고 말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함께 해안가를 거닐기도 하고, 다시 바위에 앉거나 위쪽으로 통하는 계단에 걸터앉기도 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다. 오늘의 일과나 최근 읽는 책에 관한 이야기와 같이 비교적 사소한 주제부터 근래의 국제적인 소요에 대한 정치적·학문적인 견해나 여러 사조에 대한 비판적인 토론까지 대화의 물꼬는 막힘없이 트였다. 박학다식한 그는 어떤 논제에도 망설임 없이 맞부딪쳐왔다. 그 치열한 논쟁이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여섯 시간이면 결단코 짧은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텐데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왜 이리도 짧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건만 매번 그 십분지 일만큼도 다다르지 못하는 느낌이다. 그와의 대화는 참으로 기묘한 데가 있다. 그가 대단한 달변가라거나, 나보다 뛰어난 말솜씨를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막상 그와 마주하면― 그래, 마치 마법에 걸린 것만 같다. 눈앞의 대화 자체가 지고의 향락과 다름없어 그 유혹에 홀린 나머지 무언가를 의심한다거나, 물어본다는 생각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충동만이 온 신경을 지배한다. 이런 경험을 하기는 난생 처음이다. 어쩌면 암페타민을 복용한 사람들이 보고하는 황홀경이 이런 느낌일까? 단 한 사람과의 대화가 이토록 강렬한 환희를 가져다줄 줄이야.
내일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대로라면 그와 나눌 이야기 뭉치를 기록해서 준비하기라도 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 아찔한 현혹이 두려우면서도 기껍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렇다면 좋다! Komm, süßer Tod! 나는 마땅히 모든 유혹과 그 대가를 받아들이겠다!
9월 22일
오늘은 무테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가 매일 밤 해안가에 나온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고, 가끔 그곳을 거닌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내심 당연히 그가 그곳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또한 나와의 대화를 바랄 것이라고 멋대로 기대했다. 매달리고 있던 것은 나뿐이었던가? 제대로 계획되지도 않은 사소한 만남이 틀어졌을 뿐인데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낙심했다. 그가 오지 않을 만큼 시간이 저물어서도 계속해서 해변가를 거닐었다.
이곳을 떠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나흘……. 무테이는 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통 입에 담으려 하지 않으니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르는 걸까? 아니, 애초에 그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최소한 바다 이외의 장소에서 만날 수는 없을까?
내일은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9월 23일
다행히도 오늘은 무테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해가 저물기에는 한참이나 남은 5시부터 해안가에 내려가 기다리고 있으니 한 시진이 지났을 즈음 저 멀리서 무테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에게로 달려가자 그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자네로군. 반갑기야 하다만, 혹시 어제도 왔는가?”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스런 투로 자네가 오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고 말하자 무테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군. 고의는 아니었지만 속상했다면 미안하게 되었어. 나라고 언제나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다 보니.”
“그러지 말게. 사과를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야! 멋대로 기대한 건 내 쪽인걸.”
내가 손사래를 치자 무테이는 잠시 내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뒤쪽의 바위에 앉아 계속해서 바다를 바라보았는데 그 모든 행동이 몹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아마 내가 이곳을 찾기 전까지 그는 몇 번이고 그렇게 홀로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했겠지.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레 그의 옆에 앉아 나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내 쪽이었다.
“저번에도 이야기했던가? 나는 여기 이탈리아로 잠시 휴가를 나온 상태라고.”
“응. 에어체룽그에서 왔다고 했었지. 독일 근처의 소국 말야.”
“그래. 두 주일 동안의 짧은 휴가계를 제출했는데, 나흘 뒤면 마지막 날이 되네. 그날이 되면 다시 에어체룽그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지.”
무테이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자네와의 연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든 자네의 곁에 있고 싶은 심정일세. 자네는 어디에 머물고 있지? 아예 이 도시에 사는 건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날 수는 없나?”
“진정해, 란기리. 흥분한 모양이군. 나도 자네의 이야기에 제법 놀랐어. 이곳에 오래 머무를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흘밖에 남지 않았을 줄은.” 무테이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다른 한쪽 손으로 가볍게 제 턱을 쓸었다. “나로서도 아쉬운 부분이 많네.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가 되어서야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애당초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나 할까, 하고.”
“그래!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심정일세.”
“알고 있어. 하지만 자네, 나를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실상 만난 지 이틀도 되지 않은 사이일세. 말마따나 자네는 나의 거취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지. 아는 것은 얼굴과 나이, 이름뿐이야. 게다가 나흘 뒤에는 이곳을 떠날 예정이고.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나로서도 판단하기 어렵군.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네. 나는 이탈리아 시민은 아니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살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셈이지.”
“그렇다면 에어체룽그로 오는 것은 어떤가? 자네 정도의 학식이라면 내 선에서도 좋은 자리를 소개해 줄 수 있네.”
“배려는 고맙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쪽으로는 이동하기가 어려워. 자세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일단은 일종의 지병……이라고 해둘까. 이곳, 적어도 해안도시에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어.”
바닷가에 머물러야 하는 병이라니. 그런 병은 여지껏 들어본 적도 없어 당황스러웠지만 어쩌면 요양을 에둘러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네는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지낼 생각인가?”
“한동안은 그렇겠지. 나 또한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자네와 나의 상황이 어긋나니 마땅한 수가 없군. 그래도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 침울해하지는 말게. 나중에라도 자네가 다시 이탈리아를 찾을 수도 있고, 나도 며칠 정도는 에어체룽그를 찾을 수도 있는 노릇이잖나. 자, 그러니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나도 자네가 떠나는 날까지는 가급적 이곳을 찾아올 테니.”
무테이는 그리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고작 며칠이라니.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차라리 그를 만나기 이전이라면 모를까 그라는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영원히 결여와 부재에 시달릴 것이다. 저 지옥의 탄탈로스처럼, 눈앞에 물과 과실을 두고 영원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야 겨우 깨닫는다. 내가 기나긴 길을 걸어 이곳까지 도달한 것은 오로지 그를 만나기 위함이었음을. 그러니 이제 망설일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날이 밝는 대로 본국―에어체룽그의 연구소에 연락을 넣어 보아야 하겠다. 분명 며칠 전 들렀던 ■■ 가家 산하의 자매연구소에 인력이 부족하다고 했으니 사정만 잘 설명한다면 어렵지 않게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다.
9월 24일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어찌나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는지 분명히 기꺼운 일임에도 이 모든 게 누군가의 꿍꿍이속에 놀아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황당무계한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뭐,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말이다. 그만큼 모든 일이 내가 예상할 수 있던 최고의 방향으로 맞아떨어졌다.
에어체룽그 측의 전보에 의하면 휴가가 끝나는 대로 즉시 연구소에 투입할 수도 있다고 하니(고맙긴 하지만 며칠 정도는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기는 하다) 가장 큰 걱정은 덜어낸 셈이다. 이외에도 영주권이나 소속 서류 등 서문 상의 문제들이 남아 있긴 해도 그 정도는 자잘한 문제에 불과하다.
덕분에 저녁에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무테이를 만날 수 있었다. 무테이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확연히 놀란 눈치로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노라 이야기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의 얼굴에 그리 선명한 감정을 드리워지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신의 가호가 따른 게지.”라는 나의 말을 듣고는 곧 언제나와 같은 단정한 무표정으로 돌아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렇네. 이 또한 신의 사랑, 신의 인도일까.” 다소 뜬금없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테이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신께서 너와 나를 도우셨다는 의미야. 자, 이제는 적어도 몇 달간의 유예는 생긴 셈이니 한결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든 이야기에는 끝이 없을 터야.”
그의 말을 들으니 모든 상념이 날아가는 듯했다. 그렇다. 다른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우리들의 앞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그 옆에는 그보다 많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한껏 들떠 앞으로의 계획과 이 도시에서의 삶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했고, 무테이는 잠자코 팔짱을 낀 채 나의 말을 듣다가 이따금 맞장구를 쳐주거나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한창 산업화·기계화되고 있는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아직 토속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사람이 사는 데다 지난 수년간 여러 시설이 들어서서 생활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풍습이나 역사 등, 이곳에 대해 굉장히 해박한 것을 보아 아마도 내가 오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머문 모양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었고 내일부터는 꽤나 바빠질 예정이었으니 오늘은 비교적 이른 시간에 그와 헤어졌다.
“내일 봐.”
“가능하다면.”
이게 우리들의 인사였다. 물론 전자가 나, 후자가 무테이의 몫이다. 앞으로도 몇 번이나 저 인사를 주고받게 되겠지.
9월 25일
연구소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가 다 지나갔다. 에어체룽그의 연구소로부터 서신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어두고, 인적사항을 등록하고, 숙사를 배정받고, 기타 서류, 서류, 서류…….
갑작스런 전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장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인 건 다행이지만 아직 정식 연구원이 된 것도 아닌데 연구소 내부에 대한 설명까지 듣고 숙사까지 배정받다니 이래도 되는 건지. 랜들 선생의 이름은 이곳에서도 건재하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해안가에 내려가지 못했다. 당연하단 듯이 언제나 기다리는 건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앞으로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길지도 모르겠다. 숙사는 이곳으로부터 그리 멀지는 않지만 해안가까지는 약간 거리가 있는 편이라 퇴근이 늦어지거나 피로가 쌓이면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나를 기다리는 무테이라니,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아니, 역시 상상이 가지 않는다. 죄책감을 없애고 위안을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무테이라면 나 없이도 상쾌한 밤 산보를 즐길 위인이다.
그래도 역시 내일은 어떻게든 해안가로 가야겠다. 무테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9월 26일
호텔에 있던 짐을 숙사로 옮겼다. 에어체룽그 측에서 두고 간 짐을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오긴 했지만 이곳까지 도착하기에는 한세월이 걸릴 테니 부랴부랴 시장으로 달려가 그동안의 생활을 위한 물건들을 장만해야 했다.
저녁에는 산책 겸 해안가로 가서 무테이를 만났다. 무테이는 어제도 이곳에 온 모양이었지만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와 나의 만남은 밤 산책을 즐기는 괴짜들의 우연한 동행 정도가 될 터다. 그만해도 어지간한 친구보다는 자주 만나는 셈이니 불만은 없다. 어차피 앞으로는 나도 낮에는 시간이 없을 테고 말이다. 바다라는 한정된 공간이 약간은 아쉽지만 어쩐지 그게 또 비밀스러운 심상을 증폭시키는 것만 같아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언젠가는 휴일에 그와 함께 도심으로 가서 술이나 커피라도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9월 27일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이었을 텐데 새로이 연구소에 들어가는 날로 변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연구소장은 나를 환대해주었지만 정작 앞으로 함께 일할 동료 연구원들은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그 작자들 입장에서 나는 이방인인데다 낙하산이나 다름없을 테니 곱지 못한 눈으로 보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래도 대체로 순박한 사람들이라 넉살스레 다가가니 빠르게 친해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직까지 거리를 두는 사람이 몇 있기는 해도, 이대로라면 에어체룽그에서처럼 편한 곳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다.
첫 출근은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났고 저녁에는 오랜만에 신입이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다 함께 펍으로 가 술과 음식을 즐겼다. 분위기는 내리 유쾌했고 사람들과도 훨씬 친밀해질 수 있었다. 술은 독일에 비해 약간 아쉬웠지만 음식은 훨씬 맛있었으니 식사 측면에서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다만 특이하게도, 이곳에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부터 이질적으로 느꼈던 점이지만 바다에 접해있는 해안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생선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초류나 조개류는 맛있게들 먹으니 바다 비린내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다고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도 않고. 이것도 이 지방의 특이한 풍습 중 하나일까? 이를테면 애니미즘이라거나. 이제 시간도 넉넉하고 한동안 머무를 곳이기도 하니, 느긋하게 이 지방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참고로 숙사의 침대는 꽤나 편안하다. 다행히도 잠을 설칠 일은 없겠군!
9월 28일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들러 이 지역에 관련된 향토자료를 둘러보고 몇 권은 빌려왔다. 토속학이나 문화인류학은 내 전공이 아니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할 것도 아니니 시작은 신화나 야담집 정도면 적당할 터.
간단하게 훑어본 결과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내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고 특히 세이렌에서 파생된 인어 설화가 주를 이루는 듯했다.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이 바로 이곳에서 발원한 것이라는 주장도 꽤 있나 본데 흥미롭기는 해도 그리 와닿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버려진 성을 떠도는 유령이라거나 마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견디다 못해 바다에 뛰어든 청년의 이야기 등 다양한 설화가 구전되었다는 모양이다. 생각보다는 시시한 결과라 차라리 아예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테이도 내 이야기를 듣고는 시장의 노인들이나 동료들에게 물어보거나 좀 더 지엽적인 책을 찾아보는 것이 낫겠다며 책 몇 권을 추천해주었다. 그가 추천한 책이니 분명 재미있겠지. 내일은 근처 카페에 가서 그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겠다.
9월 29일
무테이가 추천해준 책 중 반 정도는 이미 한참 전에 절판되고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거나 보존서고에나 있는 것들이라 찾는 데만도 일이었다. 그나마 두 권은 사서의 지인에게 물어물어 겨우 구해볼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알아볼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뭣보다 일단 무테이가 언급한 책들은 읽어보고 싶고.
어쨌든 온갖 고생을 하며 구한 두 권의 책은 꽤나 예전에 쓰인 것처럼 보였고 두께가 상당했다. 지금도 책 한 권의 반절 정도밖에는 읽지 못했지만, 무테이의 말마따나 전날 읽은 책들보다는 훨씬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무테이는 내 말을 듣더니 의도치 않게 봉변을 겪게 했다며 유감을 표하면서도 하하 웃었다. 본인도 한참 전에 헌책방에서 본 책들이라 그렇게 구하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면서. 그의 집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책이 있을지 궁금하다.
9월 30일
시장은 들르지 못한 대신 동료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회식 때 생선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신기했다는 내 말을 듣고 저들끼리 마주 보고 웃더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안 그래도 이곳 지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들 놀라는 부분이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인어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지요?”
그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신화 속의 생물이 바로 인어 아닌가. 일본의 전설과는 달리 유럽 전설 속의 인어는 매우 유혹적인 미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곳의 인어 전설도 대체로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처럼 마녀의 요술이라도 걸리지 않으면 두 다리를 가질 수 없는 다른 지역의 인어들과는 달리, 이곳의 인어는 두 다리를 갖고 물과 뭍을 오갈 수 있다고들 한다나. 다리를 가진 인어라니! 그렇다면 인간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들은 재미있다는 듯 이야기를 이었다.
“물론 인간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피부 표면에 아가미를 갖고 있다거나, 비늘을 갖고 있다거나……. 하지만 그걸 숨기고 완전히 인간처럼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이 지방에는 그런 인어가 살고 있고, 아주 오랜 옛날에는 인간과 가정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게 또 다른 전설과 이리저리 섞여서, 결과적으로 인어의 자손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나요. 물론 우리 같은 요즘 사람들은 그런 전설 때문이라기보다는 집안 어른들이 물고기를 즐겨 먹지 않으니 취향이 그렇게 형성된 것에 가깝습니다. 아마 우리 윗세대도 그런 식으로 취향이 형성되었으리라 생각하고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실제로 인어가 존재해서 그런 풍습이 생겼는지, 아니면 외부인―특히 해산물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내륙에서 온―을 인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데에서 비롯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인어와 인간 사이의 후손은 이민 2세 정도가 될까? 현대인인 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후자가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기는 한다.
10월 1일
하루종일 수술과 연구. 책을 읽을 기운도 없어서 누웠다. 이 일기장도 곧 덮고 잠들 예정이다. 의약업에 투신한 후로 가장 성장한 것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드는 능력인 것 같다.
10월 2일
오늘은 그래도 여유가 있어서 지난번에 구한 책을 읽어볼 수 있었다. 저번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느꼈지만 이곳의 설화적 존재로서의 인어는 확실히 인간적인 면모가 강한 것 같다. 무차별적이고 자비 없는 자연-바다의 공포를 형상화한 존재답게 두려움을 느낄 만한 성질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처럼 친숙하고 감정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지금은 세이렌과 인어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나,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여성형으로 묘사되는 세이렌과는 달리 인어는 양성 모두의 목격담이 기록되어 있으며 애초에 반인반수의 형상도 아닌 것으로 보아 세이렌의 전설과는 아예 별개로 보는 것이 옳은 듯싶다. 책에서도 세이렌과 인어를 다른 장에서 다루고 있고 말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 오래전에는 인어들이 어부들을 도와 어획량을 늘려준다는 전설도 전해져 내려왔다는 모양이다. 어느 지방의 어느 전설이나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 여러 판본이 뒤섞인 것 아닌가? 물고기를 잡든, 물고기를 동정하든 하나만 하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하긴 따지고 보면 나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어쩌다 보니 아주 인어 연구가처럼 되어버렸군그래.
10월 3일
드디어 에어체룽그로부터 짐이 도착했다. 고맙게도 옆방에 묵는 동료들이 짐을 옮기는 걸 도와준 덕에 정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짐 사이에 일본에서 가져온 물건들도 보이길래 그 중 향을 비롯한 몇 가지를 골라 무테이에게 가져다줬다. 이전의 일기에는 써두지 않았지만, 내가 이곳에 머물기로 한 뒤로 무테이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려 들지만은 않아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번의 이야기도 그렇고 오랫동안 일본에 돌아가지 않은 것처럼 보이니 그에게 좋은 선물이 되리라 생각했다.
무테이는 내가 건넨 선물들을 보고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의 성격상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기는 해도 제법 만족스러운 기색이기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10월 4일
며칠 만에 시장에 들러 노인들에게 이곳의 풍습이나 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 노인들은 대개 보수적인 편이니 어느 모로 보나 외지인인 나에게 까다롭게 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친절하게 맞이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부분은 저번에 동료들이 들려준 것과 비슷한 이야기였던지라 실망감이 역력했으나 마지막에 만난 장로의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는 대략 아흔 살이 된 이였는데, 다른 노인들이 말하기를 아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의식도 또렷하기에 세간에서는 그를 두고 인어의 고기를 먹은 자라는 소문이 있다고도 했다.
다른 노인들이 자리를 비우고 둘만이 남게 되자 그는 대뜸 인어에 관해 묻고자 찾아왔느냐며 물었고 나는 그렇노라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이곳의 전체적인 풍습이나 전설이 궁금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일 테니.
그는 내 의중을 살피려는 듯 잠시 내 쪽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인어를 본 적이 있네.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테지.”
그는 어린 시절 바닷가를 뛰어노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말했다. 집 앞의 해안가는 물론이고 저 멀리의 해안까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해안이든 아무도 찾지 않는 해안이든 모든 곳이 그의 영역이었다. 홀로 있는 날이면 부모님의 충고를 뒤로 하고 바닷가에 나가는 일도 잦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한 존재를 만났다고 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의 존재. 어린아이의 눈으로도 눈앞의 이가 보통의 사람과 다르다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몹시도 아름다웠고……얼굴이 창백했어. 혈색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마치 시체 같았지. 하지만 아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네.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은 결단코 인간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었어. 새빨간 눈. 그렇네. 새빨간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네.”
그는 몹시도 두려웠지만 동시에 그 존재에게 강렬하게 이끌렸노라고 말했다. 마치 그 존재가 자신을 부른 것만 같았다면서. 인어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오는 모습을 보고, 바다를 바라보며, 가끔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인어에게 단단히 홀려 그것이 다시는 모습을 비추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해안가를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분명 한참 전의 일일 텐데도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노라는 말을 하면서는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절절한 그리움과 상처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날더러 인어의 고기를 먹었다고들 하지만 다 뜬소문이야.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조차 없었어. 언제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지. 하지만 그와 만난 덕분에 내가 이리 길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몇 번의 대화를 더 주고받은 뒤 이곳에 풍습에 관해 물었다.
“듣기로는 인어가 인간과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던데요. 지금 많은 사람이 물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그 영향이라고…….” 그는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예전에는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들은 전부…… 전부 바다에 있어. 저 바다에…… 나는 갈 수 없는 그곳에.”
칼날같이 단호했던 말투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짙은 회한을 품으며 잦아들었다. 그는 곧 피곤하다며 나를 내보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몰라도 그와의 대화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나 개운하기는커녕 오히려 섬뜩했다. 그는 마치 아름다운 추억인 양 이야기했지만, 만약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대체 그 사소한 만남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팔십 년도 넘게 지난 일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집착하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무테이는 어째서 나를 그에게로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