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러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여름 내내 모든 것을 불태울 것처럼 내리쬐던 태양도 신께서 관장하시는 기묘한 세계의 이치 하에 그 힘을 빼앗기고 밤의 장막 속에 제 모습을 서둘러 감추려고 할 무렵이었지요. 나는 아직도 그 날을 어제처럼, 아니, 어제보다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 날을 되새겼는지 모릅니다.
그 날의 다른 모든 것은 여느 때와 비교해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수업은 흥미로운 동시에 지루했고 풀벌레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후회 없이 태우려는 듯 목 놓아 울어댔습니다. 그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찬송가의 음색과 겹쳐지니 어쩐지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딱 그 정도의 감상이 어울리는 무난한 날이었습니다. 성내 중심가의 교회당에서 이루어지던 그 날의 마지막 수업이 끝날 즈음까지는요. 교수가 맺음말을 하자 다들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갔습니다. 누군가는 집으로, 누군가는 술집으로, 누군가는, 뭐, 여관으로 향했겠지요. 그러나 M만은 언제나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아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북적임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적고 있는 것도 같았어요. 나는 교수에게 몇 가지 질문할 것이 있어서 늦게까지 그곳에 남아있었습니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으나 우리 사이에는 잠시간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곧 교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뒤돌아서자 그의 책상 쪽에 인영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 위에 종잇조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놓여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M은 막 건물을 빠져나가던 찰나였기에 당장 그를 불러 세우고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리 하지 않았어요. 조심스레 그 자리로 다가가 몰래 그 종잇조각을 품 뒤에 숨긴 채로 교수를 배웅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 건물에 남았습니다.
당장 M에게 알려주면 되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바로 달려가면 될 텐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스스로도 문득 당혹스러워 자문하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그 답을 몰랐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정하고 싶을 뿐이었겠지요. M이 앉아있던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종잇조각을 본 순간 분명 그 안에는 범상치 않은 내용이 적혀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논리보다는 예감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었어요. 나는 그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정적이 감도는 건물 안에 이제는 나 혼자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그가 남기고 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크지 않은 종잇조각에 아주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있었습니다. 라틴어 같지도 않았고, 피렌체어나 프랑스어 같지도 않았습니다. 중간에는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것도 쓰여 있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 언어를, 기호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수도원으로 향하기 이전부터 속해있던 근원의 세계에 존재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내가 공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차마 알지 못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기막힌 우연, 아니, 필연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수업에 대한 메모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이 성경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었어요.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을 비롯한 창세기에서부터 신약의 우화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르침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이 적혀있었습니다. 군데군데에는 고대 현자들의 가르침으로 보이는 내용들이나, 생전 처음 보는 성격의 담론도 보였습니다. 매끄럽게 완성된 글이라기보다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거칠게 적어둔 것에 가까웠기에 각각의 내용이 제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합쳐져 하나의 거대한 견해를 구성하는 형태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형태는 몹시도 새롭고─그래요, 상당히 불경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종이를 잡고 있는 손이 마치 데인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고, 떨려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이봐.”
M의 목소리였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문가에 반쯤 몸을 기댄 채로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방금 막 도착한 눈치는 아니었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아, 자네인가. 언제부터 있었나?”
“글쎄. 적어도 자네가 그 글씨를 읽어내기 시작할 즈음에는. 집중하고 있는 것 같기에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는 예의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설마하니 정말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는. 이건 확실히 의외라고 해야겠네. 어쩌면 이 또한 신의 인도이고 운명일까.”
“일부러, 였던가?”
“글쎄. 어떨까? 날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호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긍정의 대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조금 전에는 격정에 사로잡혀 미처 떠올리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만큼 치밀한 이가, 아무리 암호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이토록 문제적인 글이 적힌 종이를 부주의하게─그것도 교회당에!─놓고 갔을 리는 없었습니다. 필시 나를 시험하고자 한 것이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어느 정도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이 위험천만한 행위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 것인가. 나는 그 답을 알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는 나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가? 잡문에 불과하긴 해도 글은 글, 독자는 독자. 감상이 궁금한데.”
“감상이라!” 나는 종이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감히 무어라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너무나도 탁월하고, 그만큼 문제적이야! 그래. 급진적이지, 급진적이야. 자네가 아니라면 이 곳에 있는 다른 누가 감히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하지만, 역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군. 자네의 이 의심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는 내 말을 듣고 기다렸다는 듯 대답해왔습니다.
“다른 모두가 그렇듯, 나 또한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하고 있지. 이마저도 신의 사랑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주겠나.”
“그렇다면 자네는 신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의심을 채택했단 말인가?”
“그래. 의심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중요한 능력이지. 어쩌면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겠어.”
“미덕이라고.”
“어디까지나 대상과 상황의 문제라는 거지. 주님의 말씀을 감히 의심한다면 그건 분명 부정한 일일 테지만, 우리 앞에 놓인 것은 그에 대해 인간들이 붙여놓은 갖가지 해석일 따름이야. 그것은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어. 아니, 오히려 마땅히 그래야만 해. 지금의 세상을 생각해 봐. 성직자들을 포함해서 온갖 주석자들이 신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않나? 이것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그러니 사람들은 그들이 창조한 환영에 사로잡힌 나머지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만을 희구하면서─진정으로 주님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발전하지도 못한 채로 무지와 정체라는 이중의 어둠 속에서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거지. 응답하지 않는, 응답할 수 없는 신에게 기도하면서! 우리는 그 벽을 넘어서야만 해. 그리고 진정으로 무엇에 주께서 깃들어 있는지, 또한 무엇이 악마의 속삭임인지 구별해내야만 하는 거야.”
나는 홀린 듯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뱉는 말들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나에게로 꽂혀 들어오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믿음이요.
그가 말하는 의심이란 단순한 냉소와 부정의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경지를 넘어서, 스스로를 믿고 그보다 나은 것을 찾아내어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상식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새로운 이상을 단순한 구상의 범주에서 그치지 않고 실현시킬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지성이, 그에게는 존재했습니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악마의 도움이 필요한 일도 이따금씩은 있을지 모르지. 신께서 안배한 데에는 다 뜻이 있지 않겠어.” 그가 작게 속삭였습니다. 역시나 충격적인 발언이었지요!
“도대체─”
“자,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까. 신을 이야기하는데 어찌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나? 우리 같은 학생들이나 일반적인 사제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에 계시는 교황마저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는 하나 결국은 인간이야. 불완전한 인간이란 말이지. 바로 이 불완전함─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의심의 능력이다.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되는 문제야. 우리는 의심해야 해. 그리고 끊임없이 물어야 하지. 과연 무엇이 옳은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신과 인간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고통 받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상상. 이것만이 눈이 가려진 인간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습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지고의 성자를 좇는다는 자들이 이 정도의 견해조차 포용하지 못한다면 한심할 노릇이지. 황제와의 알력싸움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청빈의 미덕조차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교황청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얼마나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는지, 안타까울 지경이야. 그야말로 정체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 세계는 끊임없이 신의 사랑에 따라 움직이는데, 정작 신성을 좇는다는 이들은 선현의 해석을 경전처럼 따르고 있으니 말이야.”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고, 그 빛이 교회당의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와 그를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란 미명 하에 만들어진, 신약의 내용을 담고 있는 아름답고도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이제 찬란한 색으로 빛나며 그에게 색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차분하고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돌던 그의 갈색 머리칼과 눈이 그때만큼은 타오르는 불처럼 붉은빛을 발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내가 언제나 좇아왔던 그의 두 눈, 언제나 또렷한 무언가를 바라보던 두 눈이 분명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여전히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넘어서서, 더욱 큰 무언가를.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열망을 잊고 퇴색하며 침잠한지 오래인 이 세계에서 상식과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저 드넓은 하늘로 날아오르고자 하는 의지─그 태초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영원토록 움직이지 않고 닫혀 있을 것만 같던 나의 세상에는 그가 일으킨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바람이 내민 손을 맞잡는다면 나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간신히 입술 끝을 달싹였고, 말을 토해냈습니다.
“자네는 그 두 눈으로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한낱 인간의 몸으로─ 무엇을 상상하며, 추구하고 있는 건가?”
그는 마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내 육신이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리고 이 두 눈은, 지금은 자네를 보고 있지. 이곳에서 유일하게 충만한 상상력과 의심의 능력을 지닌 인간, 그러나 여전히 그 근원으로부터 발원한 숙명을 직시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련한 인간을.”
그는 나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이며 눈을 맞춰왔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질문할 차례야. 자네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자네를 이곳까지 인도했어? 교리문답을 이어가도 좋겠지만, 나는 그 쪽에 더 흥미가 이는 걸. 자네의 시선이 그간 나를 좇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두 눈으로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지?”
아, 내가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나에게 그를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져있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우연이라는 말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련한 짓임을 나는 알았습니다. 내가 그를 좇고 있었다면 그는 나의 근원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와 나는 근원으로써 이어져 있었고, 나는 그를 통해 세상에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운명, 혹은 의지! 무엇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신이 창조한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는 단 한 사람의 인간, 그러나 그 안에 수많은 잠재력과 이상을 품고 있는 인간을 보았습니다.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이 수도원의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며 찾아오던 그 이상을, 갈망을 그는 언제나 또렷하게 직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의 등불, 나와 같은 우자愚者를 위한 인도자로서 그 앞을 비추면서요.
“나는 오랫동안 벗을 찾아왔어.”
나의 입에서는 저절로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 여태까지는 그 갈망을 미처 알 수 없었지만, 지금에서야 확신이 들어. 바로 그대와 같은 이를 나는 찾아왔어!”
그때 내가 어떻게 말을 끝맺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벅찬 환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저, 여전히 나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은 채 대답해왔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는 내게 손길을 건네며 말을 이었습니다.
“내 이름은 하라다 무테이야. 너의 이름은?”
갑작스런 물음이었지만 나는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본명. 그것을 그는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대답했습니다.
“란기리. 우츠기 란기리.”
“그렇군. 좋은 이름이야. 이런, 벌써 해가 저물어가네. 하지만 여전히 기나긴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계속할까. 자네가 원한다면.”
“물론, 언제까지라도!”
그날 밤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여관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상理想에 대해, 내세와 현세에 대해, 인간의 고통과 슬픔, 절망과 구원, 의학의 극의,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서 말입니다. 환희와 흥분에 겨워 피곤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끝 또한 있어야 하는 법. 한참 동안 이어진 대화를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다음 날을 기약하며 여관을 빠져나왔을 때에는 벌써 온 도시가 정적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 우리가 함께 바라본 하늘에는 여느 때보다도 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찬란한 성공과 영광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에는 한 가지의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습니다.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둘만이 남을 때면, 그와 나는 언제나 서로를 M과 L이라는 세례명이 아닌 본래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무테이, 란기리라고요.
그리고 그날 우리가 나눈 약속들은 그의 육신이 사라지는 날까지 지켜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