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전처럼 그와 내가 함께 양호실에서 병자의 진료나 연구를 이어나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며칠 전의 사건으로 사이가 다소 소원해진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문제가 되었던 것은 외부의 시선이었습니다. 역병으로 들끓는 양호실에서 나 혼자만이 감염되지 않고 살아남은 일이야 어떻게든 우연이니 신의 가호니 하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무테이까지 더해지면 단순한 우연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내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었으니, 그에게만 약을 주었다거나 마술을 부렸다거나 하는─이는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의심의 눈초리가 고개를 들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만 했지요. 그런 연유로 무테이 쪽에서 먼저 계속 본관에 머무르며 제 나름대로 연구를 이어가겠다고 제안했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혹여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마술을 이용한 특정한 신호를 통해 소통하고 주기적으로 묘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다음 조각과 L의 일부를 그에게 넘겼습니다.
무테이와의 재회가 이루어졌을 즈음 역병의 희생자는 사망자와 병자를 통틀어 약 스무 명에 이르며 정점을 찍고 잠시 주춤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 후 일주일간 새로 발병한 자는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양호실과 옆의 창고에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십여 명의 병자가 누워 있었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고, 그 사이를 틈타 지금까지의 실험결과에 기반하여 L의 개량과 이론화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실험이 거듭될수록 차차 L의 제조 및 희석 결과가 안정됨에 따라 병자에게 L을 투여했을 때 나타나는 통증과 병증, 그리고 기타 부작용이 완화되는 정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며칠 뒤 연구의 결과를 보고받은 무테이가 불안정한 예후의 원인으로 L 자체의 불완전성뿐만 아니라 원료가 되는 조각의 본질인 의지의 발현을 지목하고 나서는 더욱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이는 곧 병자가 지닌 생 혹은 사에 대한 의지가 조각의 성질과 결합하여 커다란 작용 혹은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가설로서 앞선 몇 명의 사례를 적용해보았을 때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병자 본인을 통제하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L의 성질을 통제해야만 했습니다. 둘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원인을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커다란 수확이었지요. 상황도 낙관적이었으니, 이대로만 이어진다면 조만간 완전한 치료제를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예상을 뒤엎고 다시금 병자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런 유행의 원인은 처음 병이 유행하며 그 모든 소망도 진창에 처박힌 꼴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간 어중간하게 개선된 L로 인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연명은 할 수 있되 완치는 불가능한 L의 완전치 못한 효능이 독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늦추어지면서 당장 병상 위에 누워있는 이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연구를 비롯한 다른 활동에 손을 댈 수 없어졌음은 물론이고 병자 하나하나를 간병하기만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저보다 일찍 발병하여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는 형제를 보고는 겁을 먹어 치료를 아예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고통 받으며 죽어갈 바에야 며칠간 짧고 강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안식을 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자살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는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여전히 수많은 형제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내 손을 붙잡고 간절히 부탁해왔으나, 어느 쪽이든 낙담스러운 일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겨우 찾아낸 단서를 지표 삼아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는 것만 같았고, 그럴수록 나는 더 절박하게 L의 제조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매달린다고 할까, 집착? 그래요. 무테이는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그 말 대로였습니다. 나는 완전히 L에 사로잡혀 집착하고 있었지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갈수록 나는 저 멀리에서 빛나는 것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수도원의 상황은 마침내 수도원장까지 감염되어 들어오면서 완전히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감염 증세를 보이는 젊은 수사에게 부축 받으며 양호실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자 헛웃음조차도 나오지 않더군요. 눈대중만 해보아도 이제 막 발병한 사람치고는 그 상태가 상당히 위중하기에 함께 들어온 수사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몇 시간째 보이지 않다가 수도원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스스로가 발병했음을 깨닫고는 겁에 질려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나마 타인과의 접촉은 최소화했다는 점에서는 갸륵하다고 해야 했을까요. 다른 마땅한 방도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여느 병자에게 했던 것과 같이 종기를 째고, L을 투여하고, 경과를 지켜봤습니다.
가장 불행한 일은, 그의 수도원장으로서의 영향력이 발병 후에야 두각을 드러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발병은 일반적인 수사 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의 역사이자 생명이었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르던 몇 안 되는 수사들에게는 물론이고, 그의 미흡한 자질과 속물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내심 경멸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그는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그의 얼굴이 역병 앞에 완전히 무너져 새하얗게 질린 채 제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암담한 충격이 밀려들었습니다. 그가 병실로 들어온 후 병상 위에 겨우 몸을 눕히고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병자들의 상태도 눈에 띄게 악화되었습니다. 역병 후기의 착란이나 이상행동은 병자의 정서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수도원장의 모습을 보며 극심한 공포와 불안을 느꼈던 모양이었습니다. 병자들은 전반적으로 훨씬 더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고 착란 상태에서 병실로부터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이도 부쩍 늘어났습니다. 정작 수도원장 본인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흐릿한 시선으로 천장을 좇으며 방언과도 같은 말을 웅얼거릴 뿐이었습니다.
한편 그날은 간만에 무테이와의 만남이 예정되었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잔뜩 흥분한 형제들을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잠에 들게 한 다음 묘지를 찾아가자 무테이도 무척이나 피로한 기색으로 눈가를 누르며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있더군요. 내가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습니다.
“본관의 상황은 최악이야. 수도원장의 소식을 듣고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더군. 차기 수도원장인 사서나 보조사서도 싹 다 죽어버린 마당에 누군가가 통제를 할 수도 없으니. 수도원장이 죽기라도 한다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버릴 거야. 수도원장의 상태는 어떻지?”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네. 너무 늦게 발견됐어. 약초나 L을 이용해 계속해서 처치는 하고 있지만 길어봐야 일주일쯤 버틸까. 그것도 낙관적인 예측이고, 사나흘 안에 죽을 확률이 높아.”
“사나흘은 너무 짧아. 어느 모로 보나 비관적이군. 본관의 수사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도망치려 들 거야.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야 이곳에 남겠지만 지금까지처럼 원만하게 말이 통하지는 않겠지. 수도원장처럼 방에 틀어박혀 혼자 죽어갈 가능성도 높고.” 무테이는 그리 말하고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 고향이 이곳에서 두어 시간 거리였지. 어쩌면 그곳도…….”
“이미 전부 감염됐겠지. 사람이 많은 만큼 피해도 클 거야. ……아, 그렇군.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 생각을 못했어.”
정말 그랬습니다. 수도원에 역병이 다다르기 전에는 L을 제조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역병이 퍼진 후에는 마찬가지로 L의 제조와 병자들의 치료에 정신이 팔려 미처 고향과 가족의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전부 죽음에 이르렀겠지요. 아버지나 어머니는 이미 연로했고, 동생들도 도시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이나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성사는 받고 죽었을까, 육신은 제대로 땅에 묻혔을까. 차라리 그것이 더 궁금했습니다. 수도원이 무너져가고 있듯이 고향의 많은 것도 무너져내려가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어디에나 죽음이 있었고, 역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어디로도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떠밀려, 반쯤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습니다.
“시신을 해부해야겠어.”
“뭐?” 무테이는 아래로 두고 있던 시선을 들어 다시 나를 쳐다봤습니다.
“병의 증세를 제대로 관찰하고 L을 효과적으로 개량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실험체가 필요해. 시신을 이용한다면 살아있는 병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실험이 가능하겠지. 이제 이곳에 접근하는 건 나와 자네밖에 없고, 누군가 이곳을 찾더라도 병이 두려워 시신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할 거야.”
“그리고 시신을 빼돌리는 건, 병자와 망자를 책임지는 자네의 위치와 조만간 있을 혼란을 이용하겠다는 건가?”
“그래. 아,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형제들의 몸에 칼을 대어야 한다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일 터야. 허나 생과 사의 경계에서 우리는 망자를 모독하는 한이 있어도 생자의 손을 들어줘야 해……! 그러기 위해 걸어온 길이 아닌가. 시신을 안치하고 해부가 이루어질 장소는 찾아보아야 할 테지만──”
“아니.” 무테이는 잠시 턱을 쓸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장소라면 있어. 한참 전 서고로 통하는 길을 찾다가 발견한 건데…… 예배당 뒤편 제대 쪽에 지하실로 이어지는 통로가 숨겨져 있더군. 적어도 수십 년간은 방치되었던 모양이야. 본래는 마술의 진원지로 삼을 셈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그런 장소까지 구태여 들쑤셔볼 사람은 없을 테니. 그곳을 이용하면 되겠지.”
“아하, 배교의 근원이 되는 곳이 하필이면 예배당이라니 이거 참 역설적이군. 지금으로선 잘 된 일이야. 그렇다면, 어때. 자네도 함께해줄 텐가? 응?”
긍정이든 부정이든 바로 대답이 나올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무테이는 다시 입을 다물고는 말을 멈췄습니다. 발병한 A를 부축해 데리고 왔을 때까지만 해도 확신에 찬 채로 거침이 없던 그의 태도는 언젠가부터 자못 모호해진 데가 있었습니다. 격리로 인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떨어져 있긴 했어도 그래봐야 같은 수도원 내부였을 텐데 어쩌면 이리도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는지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서늘한 눈동자뿐이었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좋아. 어차피 내 의견이 어떻든 너는 해부를 강행하려 들 테지. 혼자서는 시신의 운반에 해부와 뒤처리까지 끝내기 버거울 거야. 단, 모든 실험은 나의 감독 하에 이루어져야 해.” 생각보다 순순한 긍정의 답이 돌아오자 나는 반색했습니다.
“그야 물론이지! 나의 처지까지 고려해주다니, 정말이지 감격스럽군!”
“글쎄. 어쩌면 루메르트의 경고가 옳았을지도 몰라.” 그는 내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 생뚱맞은 이름을 입에 올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루메르트. 그러고 보니 매일같이 L과 조각을 손에 쥐면서도 그와 세오도아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과 처음 만난 볼로냐, 그곳의 동급생들과 랜들 선생에 대해서도. 지근거리에 있는 고향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차였으니 이상할 일만은 아니었습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습니다.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그 이야기 말인가?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잖아. 그보다도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무사하다면 좋으련만! 테오도르야 이까짓 병으로 해를 입을 리 없겠다마는.”
“문제는 루메르트겠지. 혼란이 가시면 탐색을 시도해봐야겠어. 하지만 우선은 양호실로 돌아가 수도원장의 목숨을 최대한 붙여놔. 나는 그동안 본관 수사들의 동태를 살피며 지하실을 정비해놓지. 그럼.”
그렇게 그 날의 대화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양호실로 돌아오자 여전히 동트기 전의 어둠 속에서 잠들어있는 병자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폐와 기관지가 상해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들썩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시체처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도 있었기에 나는 매 새벽 병자들이 잠들 즈음이 되면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생사를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날도 빠르게 병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날이 밝기 전까지나마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차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덥석 내 팔목을 잡아오더군요. 놀라 돌아보니 수도원장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지요.
하루 종일 혼절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눈을 뜨니 탁해진 눈에 낯빛도 잿빛으로 변해서는 누군지 몰라볼 지경이었습니다. 초점을 잃고 공허해진 그의 눈에서는 죽음 외에는 무엇도 읽어낼 수 없었고, 버석해진 손만이 부들부들 떨리며 가까이 다가오라는 표현을 겨우 전달해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L과 아편을 추가로 복용시켜야겠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허공에 휘저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성호를 긋는 모양새였습니다. 죄를 지었나이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 내가 방금 전 벗에게 무어라 말을 했던가요. 일주일에, 사나흘이라니! 나는 어찌나 오만했던지. 그 사이에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단 하루만에, L을 투여했음에도!
전능하신 주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그는 더듬거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고 나는 그 옆의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시니 주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기계적으로 성사를 잇자 그가 고해를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종부성사가 끝날 때가 되자 그는 잠시 몸을 움찔 떨며 허공을 휘젓더니 곧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지요.
그가 죽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감은 그는 평온해보였습니다. 누군가는 그 모습에서 숭고함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는 허망함뿐이었습니다.
아마 그대로 잠시 까무룩 잠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종소리를 듣고 깨어나니 밖은 여전히 어두웠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문가로 걸어가 바깥의 보초들에게 수도원장의 부고 소식을 알리자 그들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더니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본관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수도원 전체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 둘, 세 번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이자 지금까지 수백 년간 이곳을 지켜온 수도원의 역사에 작별을 고하는 소리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예상대로의 혼란이 있었습니다. 캄캄한 새벽부터 해가 뜨고, 다시 질 때까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본관의 소란이 양호실에까지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이 또한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본관에 남아있던 수사들은 수도원장의 장례 문제를 두고 처리를 논의하다 이윽고 언성을 높이며 몇몇 분파로 갈라섰다고 하더군요. 수도원장에 대한 예의나 신학적인 문제였다기보다는 뭐라도 좋으니 그간 해묵은 감정을 터뜨릴 핑계가 필요했던 것에 가까웠을 겝니다. 언쟁 끝에 그들 중 일부만이 장례절차를 치르기로 합의를 보았으나, 장례절차가 치러지는 약 사흘 내리 엄숙한 분위기 속에도 숨겨지지 않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결국 매장이 이루어지던 마지막 날의 저녁에 일이 발생했습니다. 젊은 수사 넷과 중견 수사 하나가 마구간의 말을 훔쳐 도주한 것입니다. 말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에 놀라 바깥을 내다보자 본관에서 몇 명의 수사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대부분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요. 그 중 일부는 한 발 늦었다는 듯 표정을 굳히고는 옆에 있던 형제들을 밀쳐 마구간으로 달려가 남은 말을 타고 급하게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이들은 황망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은 남아있는 말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도움을 청할 여행자도 없고, 가까운 마을들도 병마에 전부 무너졌을 것이 분명한 마당에 맨발로 수도원을 나선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게 스무 명에 달하는, 그리고 그 중 반절 가량은 이미 병에 걸려 있는 이곳의 생존자들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도 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혼란의 시작이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마음속의 피난처마저 잃어버린 수사들은 감염의 여부와 상관없이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이는 언젠가 제게도 닥쳐올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 감염된 이는 머지않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아, 나의 주님, 어째서 우리들을 버리시나이까. 나는 매일 밤마다 소리 지르며 날뛰는 병자들을 잠재워두고 예배당의 지하실을 찾았습니다.
무테이의 인도를 받아 발을 들여놓은 지하실은 당연하게도 몹시 어두웠고, 먼지가 자욱했습니다. 연신 기침을 하다가 등불로 비춰보자 온갖 가구나 물건들이 한쪽으로 몰려 치워져있는 널찍한 공간이 드러났습니다. 양호실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독방 두세 개를 붙여둔 정도는 되었습니다. 탁 트인 공간의 중심부에는 고대 로마 시대에나 만들어졌을 법한, 사람이 몸을 뉘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돌 탁상이 위치해 있었고 그 옆에는 살짝만 쳐도 쓰러질 것 마냥 낡은 선반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전에는 창고로 사용되었던 것 같아. 화살촉 같은 것도 있는 걸 보아하니 요새 시절의 잔재 같은데……. 저쪽 문의 통로는 본관 서편과 이어져있어.” 무테이는 가구더미 옆의 문을 턱짓했습니다. “시신을 끌고 올 때는 예배당을 통해 들어오기 어려울 테니 저쪽을 이용하는 게 좋겠지.”
과연 그랬습니다. 그 지하실의 정체가 어찌 되었건, 우리의 입장에서는 남들의 눈을 피해 마술과 해부의 실험을 행할 최적의 장소를 발견한 셈이었으니 몹시도 잘된 일이었습니다. 이 또한 신의 안배라면 안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실험에 사용하는 시신은─처음에는 묘지에 묻힌 시신들 중 비교적 덜 부패된 것을 파내어 가져왔고, 이후에는 양호실의 병자 중 죽음에 이르는 이가 있으면 묘지에는 그의 가묘를 만들고 시신은 잠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둔 다음 한밤중 본관 뒤편의 통로를 통해 지하실로 가져왔습니다. 지하실로 시신을 옮기고 나서는 빠르게 해부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해부는 무테이와 나 둘이 함께 집도했고 L을 이용한 실험의 과정에 이르면 무테이의 감독 하에 내가 홀로 수행했습니다. 우리들의 칼은 부패하기 쉬운 영양기관부터 시작해 그 주변의 기관들로 확장해나가며, 마지막에는 사지까지 병든 인체의 모든 부분에 궤적을 그리며 그 내부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유의미한 관찰이 끝나면 나는 서둘러 표본을 채취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합성하고 희석한 L을 투여했습니다.
수도원에 온 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으니 사람의 몸에 직접 칼을 대는 것은 과히 오랜만이었지만 우리는 바로 어제까지도 함께 해부 수업을 집도한 것처럼 죽이 척척 맞았습니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아도 해부와 실험의 과정은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해부와 실험을 하는 동안에도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고, 그것을 먼저 입에 올린 것은 나였습니다. 두 번째 시신의 해부가 끝났을 때 내가 그에게 말했지요.
“이러고 있으니 대학 시절이 생각나네. 그렇지 않나?”
무테이는 분명 내 말을 들었을 터였지만 말없이 계속해서 피 묻은 탁상을 닦았습니다. 나는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런 걱정 없이 마냥 행복했지. 지금 당장이 즐거웠고, 우리의 앞에 놓인 미래는 장밋빛임에 틀림없었고 말이야. 아, 물론 지금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비록 참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만, 여전히 그대가 곁에 있으니까. 그대가 나를 발견하고, 눈 뜨게 하며 구원해준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하루도 그대에 대한 지극한 신뢰와 경애를 잊은 적이 없어.”
“구원이라고…….”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으며 그 말만이 제게 닿았다는 듯 중얼거렸습니다. 손에 든 수건은 시뻘겋게 젖어 있었고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코를 찡그리고 있었지요.
“그래! 이 영혼도, 이 육신도, 인간이 마땅히 다른 인간에게, 또는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네. 황혼녘이었지. 그대가 남겼던 암호화된 단상을 내가 해독해서 읽었어.”
“아,” 무언가 떠오른 듯 그가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때인가. 아마 신학 수업이 있던 예배당에서, 성경이나 그리스 철학에 대한 내용을 적어놓았었을 텐데.”
“맞아! 주류 해석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아주 비판적이었지. 그걸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었는지 몰라. 처음에는 무슨 자신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뭔가.”
“그때야 한창 치기 어렸을 나이니까. 지금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과거에 대한 향수에 마음이 풀린 것일까요. 그의 입가에도 아주 옅지만 분명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부드러운 표정에 신이 났던 나는 그 시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들었습니다. 첫 수업에서 마주쳤던 일,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염문이나 다툼, 해질녘 노을빛으로 물들었던 볼로냐 시내의 모습, 랜들 선생의 방이 위치하던 그 골목길……. 많은 것이 변했지만 과거의 풍요로운 기억만은 영원히 변치 않는 채로 남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그 너그러운 요람 속에서 잠시나마 피비린내 나는 현실도, 수많은 고통과 상실도 잊고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와 무테이는 탁상 위에 나란히 앉아있었고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그 날의 일이 화두에 올랐습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상당한 부분이 카인주의나 그노시스주의에 대한 내용이었을 거야.” 무테이는 또렷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그때부터 영지주의적 접근에는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까. 주류해석을 드러내놓고 공격할 의도는 없었지만 만일 성직자가 봤다면 이단 심문을 받았으려나.”
“그야 물론이지! 안 그래도 한창 종교재판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는데. 나야 그 담대함에 매료되었다지만 말이야. 아무리 암호화되어있고, 내가 발견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고는 해도 교회당에 떡하니 그 쪽지를 놓고 간 걸 봤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고.” 내가 그리 말하자 무테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살풋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잠깐, 놓고 갔다니? 네가 나를 찾아왔던 거잖아. 구약 내러티브의 해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마 그 날에 대한 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다른 모양이었습니다. 나도 마주 고개를 기울이고는 대꾸했습니다.
“응? 아니, 아니야. 무언가 착각이 있는 듯하네. 자네가 책상 위에 종잇조각을 남기고 갔잖나. 내가 그것을 읽는 사이 자네가 다시 돌아와서는 나를 불러 세우고, 의심의 가치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지.” 내 말이 이어질수록 무테이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굳어졌습니다.
“아니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것은 자네다. 거기에 내 나름의 해석을 보태고, 논의를 확대하기는 했지만.”
“이거 이상하군! 어쩌면 자네가 헷갈린 것은 아닐까? 나는 몇 번이고 그 날의 기억을 되새겼지만 자네는 조금 전에서야 겨우 떠올렸지 않나. 십 년도 전의 일이니까 기억이 변질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진 채였습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그 날에 대해 정확하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의 성정상 그토록 연연할 만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왜 저리도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그날 자네가 내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기억하지? 그리고 나의 이름을 물어왔잖아. 우리가 지금까지도 서로를 부르는 그 이름을 말이야. 무테이.”
나는 오래전 그가 내게 그러했듯,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손을 맞잡지 않고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래, 기억해. 너는 벗을 찾아왔다고 했지. 나와 같은 벗을.”
“맞아, 맞아! 자네가 기억해주어서 다행이야. 그 소중했던 순간이 나 혼자만의 추억에 불과하다면 가슴이 아팠을 걸세.”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니라도 괜찮은 건가?” 그의 굳은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습니다.
“상관없어! 어쨌든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때도, 지금도 그대는 내 눈 앞에 있고 나를 구해주었어. 그대로 인해 나는 의혹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영원불멸의 아득한 이상을 꿈꾸게 되었네. 이는 곧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작업.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 구원이겠는가!”
나는 진심을 다해 대답했지만 그에게 있어 정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미처 듣지 못해 물어보자 “듣지 못했다면 됐어”라며, 말을 피하더군요. 결국 한밤중이 되어서야 호기롭게 시작했던 이야기도 싱겁게 끝이 나며 우리는 각자의 장소로 돌아갔습니다.
묘지에 시신을 다시 묻고 양호실로 돌아와 바닥에 누우며 어쩌면 그 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나았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의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L의 개발 진척상황 이상으로 그와의 대화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조만간 그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야 했겠지만 당장은 역병과 L의 개발이 우선이었습니다. 그와 나 모두 근 두 달 간 끔찍한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영혼마저 닳아버린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전부 괜찮아질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에도 나는 지하실을 찾았고, 무테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매일같이 작업에만 전념했습니다. 시신이 있는 날은 시신을, 마땅한 시신이 없는 날은 동물을 가져와서라도요. 그렇게 몇 번의 해부와 실험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L이 완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