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 ― 下

12.

정확히는 ‘역병의 치료제로서의 L’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본래의 목적이었던 엘릭서─불로불사의 비약 혹은 만병통치제의 경지에 도달하거나, 병자의 생의 의지에 영향을 받는다는 본질적인 난점을 극복하지는 못했으니 말입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따지자면 여전히 미완의 비약이었지요. 허나 그 정도만으로도 눈앞의 역병에 대응할만한 약으로서는 분명한 효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의 증상을 완화하거나 진행도를 늦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완전한 치료를 해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이고서야 드디어, 병든 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던 그 거대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지하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병든 쥐나 고양이, 토끼 등 각종 동물들이 연이어 완치되고 시신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유의미한 결과가 나타나자 나는 치료제가 완성되었음을 직감하고 즉시 L을 든 채 양호실로 달려갔습니다. 그즈음에는 이미 수도원 전체를 통틀어 생존자가 열두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그 중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이들이 여섯 명이었습니다. 그러니 무테이와 나를 제외하면 그때까지 병에 걸리지 않았던 형제는 고작 네 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야 천운이 따랐지만,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수도원을 지키던 예순 명이 넘던 형제들이 이토록 줄어들다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기 그지없었습니다.

증상의 경중에 따라 순차적으로 L을 투여 받은 여섯 명의 병자들은 각자 다른 예후를 보이면서도 공통적으로 병세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그들 중 네 명의 수사는 완전히 치료되어 살아남았고, 두 명의 수사는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죽음에 이른 두 수사 중 한 명은 증상이 가장 극심한 수사 중 하나였기에 L의 투여로도 어찌할 바 없이 늦었거나 혹은 의지의 문제가 발현되었으리라고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한 명의 수사는 비교적 증상이 경미했는데도 죽음에 이르러 나를 당혹케 했습니다. 게다가 그 사이 병에 걸리지 않았던 이들 중에서도 두 명이 새로이 감염되어 그들에게도 L을 투여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완치된 반면 또 다른 한 명은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단순 확률로만 따지자면 일곱 명의 병자 중 다섯 명, 즉 L을 투여한 병자 중 7할 가량이 완치되었다는 낙관적인 결과로 볼 수 있었으나 그렇게만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무래도 꺼림칙한 지점이 여럿 있었습니다. 투여 대상자의 부족이나 L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의지 등의 비가시적이며 주관적인 요소라는 한계 때문에라도 결과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시피 했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어차피 남은 환자들이 완치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은 양호실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나는 그간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처음 L을 제조하고 개량, 투여했을 때의 기록부터 당장의 경과까지 정리해둔 자료들을 끌어 모아 비교하고 분석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내리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마지막 병자를 퇴실시키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 아니─나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내가 완벽하게 복제했다고 생각했던 조각들.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열화품이었습니다. 내가 조각을 복제하기를 반복할수록 조금씩, 계속해서 본래의 조각이 지닌 효과가 열화되며 깎여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L을 투여한 병자들에게서 관찰된 불규칙적인 증세는 단순한 의지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상태가 심각했던 수사마저도 L을 투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치되었는데 증세가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수사가 죽어버린 것은 그에게 투여되었던 L이 두 번의 복제-열화를 거쳤던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제야 수도원장에게 투여했던 L도 세 번의 복제를 거친 조각으로 만들어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가뜩이나 미완에 불안정한 L의 특성상 그 재료가 되는 조각의 효과가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그 효능 또한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은 타당한 수순이었습니다.

반년에 걸친 시간동안 L을 제조하고 개량하기 위해 우리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실험을 행했고, 이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양의 조각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원석으로부터 직접 추출해낸 만큼의 양이라면 역병 사태 이전의 여러 실험과 L의 초기 원액 작업으로 이미 동이 난지 오래로, 이후의 실험을 견인한 것은 대부분이 복제품들이었지요. 실패가 이어질수록 더 많은 조각이 필요했고, 그만큼 더 많은 복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원석-세오도아와의 연락이 끊긴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설마 나의 복제가 열화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나에게 주어진 온전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치명적인 결점을 지닌 허점투성이였다는 것을 깨닫자 낭패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이제 수도원을 뒤흔들던 역병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것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졌다는 생각만이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떻게든 나는, 그리고 무테이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대응하는 약을 만드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역병은 피할 수 없는 신의 징벌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우리는 이 암흑의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마지막 병자가 완전히 회복되어 양호실을 나선 날에는 나도 오랜만에 햇빛이 비치는 시간에 밖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봄은 수많은 형제들의 생명과 함께 우리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갔고 이제는 여름이 완연했습니다. 발을 떼자마자 나를 맞이하겠다는 듯 그늘에서도 피부에 와 닿는 햇살은 부드럽고도 따사로웠지만, 그 안온함에 홀려 바라본 태양은 너무나도 눈이 부신 나머지 멀어버릴 것만 같아 두려워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발짝을 떼어 양지로 나아가자 그늘가에서 날 감싸주던 사랑스러운 따뜻함도 어느새 타는 듯한 뜨거움과 따가움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무정한 빛이여, 나는 오래도록 그대를, 태양을 그리워했건만. 그러나, 아, 나는 너무도 오래도록 지하와 밤의 어둠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따가운 시야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는 수도원은 너무도 적막한데다 너져분해져 있어 마치 고대의 폐허처럼 보였습니다. 떠나간 이들로부터 버려진 바빌론의 모습이 그러하였을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수사는 총 아홉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신도 잘 아는 사람들이겠지요. 몇 해 전 사망한 C와 실종된 M─무테이를 제외한 일곱 명은 아직까지도 이 수도원에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마지막 병자가 병마에서 벗어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우리들 사이에 다시 감염되는 사람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도 새로 감염되는 이 없이 잠잠하자 그제야 모두들 역병이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석 달 만에 우리들은 참사회의실로 모여들어 소회를 털어놓았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형제들의 낯은 누구랄 것 없이 다들 초췌해진 데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서로서로의 면면을 확인하고서 누군가는 떠나간 이들에 대한 애도와 비통함에 잠겨, 또 누군가는 살아남았다는 기쁨과 안도에 겨워 눈물을 보였지만 대부분은 그 사이의 어드메를 더듬거리며 헤매고 있었습니다. 당장 지옥에서 빠져나온 이들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가까운 일이고 삶은 머나먼 이야기와 같았으니, 통 실감이 나지 않았던 탓입니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 과거에 무엇을 두고 왔든, 우리가 이곳을 떠나갈 수 없는 이상, 그리고 이 삶이 유지되는 이상은 다시금 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서서히 생과 현실에 대한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은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그간 쉰 명이 넘는 수사들이 죽거나 떠나갔고, 방치된 길가와 텃밭, 담벼락은 온갖 잡다한 풀들로 가득했으며 가축들도 야위거나 죽어 못쓰게 된지 오래였습니다. 인력과 식량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수도원의 상황을 아비뇽에 보고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고 동시에 주변 마을과도 연락을 시도하는 한편 내부를 갈무리하며 차차 재건을 해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외에도 역병 후반에 접어들어 묘지 없이 방치된 형제들과 가축들의 시신을 정리하거나, 텃밭을 고르거나, 혼란으로 어수선해진 내부 공간들을 정비하는 등 해야 할 일에는 끝이 없었습니다. 공석이 된 수도원장과 사서를 비롯한 직무의 공백을 채우는 것도 그런 일들 중 하나였습니다.

약식으로 치러진 선출의 결과에는 별다른 이변이 없었습니다. 차기 수도원장으로는 살아남은 수사들 중 가장 원로였던 C가, 사서로는 무테이가 선출되었습니다. 역병 이전부터도 그와 학식을 견줄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데다 생존자들 중 장서관의 구조에 대해 짐작이나마 하고 있는 이는 그와 나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무테이는 형식적인 감사를 표하며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수사들과 달리 그의 낯에서는 공포나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피로만은 역력했습니다. L을 무사히 투여 받은 데다 그 이후 별다른 사건도 없었으니 신체적인 문제일 리는 없었고, 역시 심리적인 부담이 남아있었던 것이겠지요. 이제는 역병도 종식되었으니 그와의 오해도 해소할 겸 조만간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회의도 끝났겠다, 당장 무테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자 했건만 갑작스레 몇몇 수사들이 나의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엉거주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란을 감지한 무테이가 흘낏 이쪽을 바라보자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양 다시 고개를 돌려 회의실을 떠나갔습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감함에 입맛을 다시며 눈앞의 수사들에게 시선을 돌리니 몇 년이나 동고동락했던 형제들 중에서도 유달리 익숙한 얼굴들이 겸연쩍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 사이의 공통점도, 그들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도 순식간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다섯 명 모두 역병을 앓았다가 L을 투여 받고 살아났던 이들이었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고, 잠시간 우리들 사이에는 감사의 인사를 포함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그들이 건네준 말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끊임없이 방황하던 내게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나도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지요.

그 날 이후 수사들도 아홉 명밖에는 남지 않은 적막하디 적막한 이 수도원에도 조금씩 활기가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남겨진 이들 모두가 죽어간 형제들의 몫만큼 바쁘게 움직이며 재건에 힘쓴 결과 몇 주 만에 언뜻 보아서는 얼마 전까지 이곳에 그 끔찍했던 역병이 돌았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물론 자세히 따져보기 시작한다면 아직도 수도원의 곳곳에서는 전부 사라지지 못한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거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빽빽하게 비석이 세워진 묘지, 넓이에 비해 여전히 황량한 텃밭, 여름인데도 갓 묘목을 심은 듯 흙투성이인 중앙정원 등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쉬이 지워지지 않을 재앙의 상흔으로서 남아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상흔들을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며 쓰라린 기억을 묻어두려고 애썼습니다.

외부와의 연락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행자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고 수사들이 직접 바깥으로 나서기에는 예의 도망 사건 이후로 씨가 마른 말이며 바깥에 여전히 유행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역병의 상황, 부족한 식량 등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방편들을 다 제하고 나면 남은 연락수단은 살아남은 몇 마리의 전서구뿐이었습니다. 회의 다음날 수도원장은 나와 무테이로부터 각자가 작성한 수도원의 역병 진척에 대한 문서의 요약본을 받아 제가 쓴 서신과 함께 비둘기의 다리에 묶어 교황청과 주변의 마을로 날려 보냈습니다. 전서구가 마을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고작해야 한 시간, 아비뇽까지 도착하는 데는 열두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도중에 매에게 사냥이라도 당했을 겁니다. 아니면 결정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거나요. 며칠이 지나도 답이 오지 않는다면 다시 보내봅시다.” 수도원장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스스로도 별로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전서구를 보낸 지 일주일이 지나고 그는 다시 전서구를 날려 보냈습니다. 며칠 뒤 다행히도 교황청으로부터 답신이 도착했는데, 간략하게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정은 잘 알겠지만 역병이 현재 전 유럽을 뒤엎고 있어 지원을 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일 역병이 잠잠해진다면─그런 날이 진정 찾아온다면!─ 인력과 물자를 지원해줄 테니 그동안은 신앙으로 무장하여 주변의 마을과 합심하여 살아남도록 하라. 언젠가는 필시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8]……. 결국 지금 당장은 아무런 소득 없이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었지만 적어도 수사들의 불안이나 동요를 잠재우는 데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프랑스가, 아비뇽이 무너지더라도 교황청만은 무너지지 않은 채 후일을 도모하고 있고, 교황 성하도 아직 건재하시다는 증거였으니 말입니다.

근처 마을들과의 연락은 그 후로도 한 번 불발되어, 첫 번째로 전서구를 보냈던 날로부터 삼 주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머잖은 작은 마을 하나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그 마을도 한참 역병에 시달리다가 이제 겨우 진정이 되고 차차 재건을 해나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간은 병으로 인한 혼란도 혼란이거니와 무엇보다도 본래 전서구를 받아야 했던 이들이 전부 죽어버린 데다 건물과 도로도 시신들로 막혀 도무지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더군요. 역병은 마을 사람 절반의 목숨을 빼앗고 떠나갔지만 사제들만큼은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 무자비하게 몰살시켰다면서, 수도원에 자원을 지원해주는 대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해줄 사제를 그곳으로 보낼 것을 요청해왔습니다.

나는 수도원에 한창 역병이 돌았을 시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당장에 마을로 내려가겠노라 이야기했지만 수도원장과 수사들은 동요하는 듯하면서도 얼마 남지 않은 의학자를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무테이도 마찬가지라면서요. 결국 논의 끝에 마을로 내려가는 것은 다른 수사 두 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수사들이 떠나기 전날, 나는 그 중 한 명의 방에 찾아가 소량의 L을 건네주며 투여의 방법과 주의해야 할 사항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혹시 모를 병자나 스스로의 죽음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그나마 맞서 싸워라도 보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현했고 나는 그에게 무운을 빌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수사는 다음날이 밝기가 무섭게 마을로 떠나갔습니다. 이 작은 수도원에 두 사람의 부재는 생각보다 커서, 가뜩이나 적막하던 수도원에는 한층 더 짙은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그들이 마을의 지원 인력과 함께 되돌아오기까지는 약 이 주간의 시간이 걸릴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이곳에 남은 우리들도 그들의 귀환 이후 다시 시작될 재건 작업을 기약하며 힘을 아껴둘 겸 본래의 업무와 소일거리에만 전념했지요. 그 덕에 아주 오랜만에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여유분의 시간동안 수도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아직 이전의 영광을 다 회복하기에는 한참이나 멀었지만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다면 불가능한 꿈만은 아닐 것도 같았습니다. 거대한 역병은 우리들 인간 하나하나는 물론 이 세상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만들어 이전과 같은 상태로는 완전히 돌아가지 못하도록 잡아두겠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이곳만은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었고 소멸이란 곧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기도 하니 나는 그 가능성에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역병이 그 고통의 산물로서 L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내보였듯이 말입니다.

수도원을 한 바퀴 크게 둘러본 다음 나는 마지막으로 이곳 예배당으로 향했습니다. 예배당은 누구의 기척도 없이 조용했고 스테인드글라스 너머 바깥으로부터 비쳐 들어오는 여름의 찬란한 햇빛만이 어두운 건물의 내부를 색색의 빛깔로 밝히고 있었습니다. 일렁이듯 빛나는 창문 속의 성화를 바라보며 천천히 중앙의 길을 따라 나아가자 저 너머에 감춰져있을 지하실의 자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홀린 듯 제단 위에 올려져있던 초에 불을 켜고 오랜만에 지하실로 내려가니 아직까지 희미하게 남아있는 피비린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새 다시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멀끔하더군요.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에 남겨두었던 마술의 촉매나 도구, 그리고 조각들이 일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아마 무테이가 그 후로도 몇 번 다녀간 모양이었습니다. 사라진 재료들의 성질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다시 본래의 연구─아카식 레코드로의 접촉과 언령의 정제에 몰두하는 것 같았지요. 그가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다시금 연구에 들어섰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지만 내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모든 일을 진행했다고 생각하니 조금쯤은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역병 초기에 나도 그에게 비슷한 짓을 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도 그 사실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걸까요.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한 달 전의 회의 이후로 한 번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도원치고는 크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작은 요새 하나에 불과한데 이곳에서 계속 함께 생활하면서 그만한 시간동안 마주치지 못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바쁜 일정이나 우연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도 억지였지요. 그러자 점점 눈을 감고 귀를 막아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사실들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와 내가 나누었던 대화마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론으로 나를 떠밀었습니다. 그가 내게서 멀어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크게 저었지만 복잡한 마음이 사라질 길은 없어 도망치듯 지하실을 빠져나왔습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그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를 원했습니다.

그날 저녁 기도를 마치고 나는 무테이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역병이 돌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만의 신호였습니다. 오랜만에 지하실에서 만나자. 할 이야기가 있어. 시간은 종과시간 이후로 언제든 좋으니,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어. 그로부터는 어떤 답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 신호를 받지 못했을 리는 없었고, 신호를 확인했다면 분명 잠깐이나마 이곳을 찾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학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매정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무른 부분이 있어 이 미진한 벗의 부탁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혼란과 오해로 가득했던 역병 시기에도 매일 밤 지하실을 찾아와 함께 연구에 매진해주었던 것이지요. 그 일말의 유약함과 다정함이 그의 앞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염려한 때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찾은 지하실은 낮에 보았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늦은 밤이라는 시간이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인지 해부를 기다리는 시신이나 재료들 없이 비어있는 탁상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 위에 초를 올려놓고 옆에 앉아 그를 기다렸습니다. 당장 그가 와줬으면 하는 마음과는 달리 그가 밤이 늦어서야 도착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냈습니다. 아까 보낸 신호는 확인했겠지? 지금 지하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다시 종이 울리기 전이라면 언제라도 좋으니 찾아와줘.

지하실은 지독하리만치 조용해 내가 현세와 유리된 다른 공간에 갇힌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벽 바깥에서 쥐가 갉작거리는 소리가 그나마 현실감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오로지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므로 책이나 종이, 마술을 위한 재료를 가져온다든가 다른 공상에 빠진다든가 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무엇이 그와의 만남을 퇴색되게 하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를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이, 기다리는 순간이 오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녹아내리는 초가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밤은 길었으니 여전히 긴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이들이 전부 잠드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시 그를 기다렸습니다. 오직 그를 기다렸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갉작거리는 소리도 사라지자 그곳에는 오로지 정적뿐이었습니다. 그대로 다시 한 시간, 두 시간…… 억겁과도 같이 기나긴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어느덧 초는 전부 다 타들어갔고 불빛이 꺼지며 어둠이 임했습니다. 지하실로 들어선 지 여섯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자정이 되었을 것이었고, 다시 종이 울리기까지는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질한 감각을 느끼며 벽에 기대어 다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와 처음 장서관에 침입했을 때도, 수많은 마술의 식式을 시험했던 것도 자정이었습니다. 두 시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눈앞에 있는 것은 한없는 어둠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아득해진 정신 속에서 뎅, 뎅, 뎅.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수도 없이 들어온 소리.

신성한 종소리가 잠든 이들을 깨우며 기도를 올릴 시간이 돌아왔음을 알렸습니다. 허나 나는, 잠들지 못했으니 깨어나지도 못했습니다. 머릿속에는 드는 생각이라곤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공연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지하실을 빠져나와야 했지만 진이 빠진 몸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떨려오는 손으로 겨우 몸을 일으켜 천천히 반대쪽 문으로 향했습니다. 머리가 멍했습니다. 오랫동안 밀폐된 공간에 갇혀있었기 때문인지, 잠들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나를, 아아, 어쩌면 나를 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온하고도 두려운 상상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걸어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미처 여명이 밝아오지 않아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있는 바깥의 하늘이 보였습니다. 그 하늘을 눈에 담으며, 남은 힘을 쥐어짜 양호실까지 몸을 끌고 갔습니다. 겨우 그곳에 도착하고 문을 닫자마자 몸도 정신도 한계에 다다른 듯 그대로 쓰러져 기절하듯 잠들었습니다.

나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또다시 종소리였습니다. 찬과를 알리는 종소리.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육신을 강제로 일으켜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자 밝아오는 하늘 아래 저 반대편의 숙사에서 빠져나와 예배당으로 향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총 다섯 명의 인영. 종을 치는 이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니 무테이도 저 사이에 있을 것이었습니다.

무어라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의 걸음은 느릿하게나마 그들의 뒤를 따라 다시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가장 앞에는 무테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앞만을 바라보고 있어 뒤에 있는 나로서는 그의 표정을 볼 길 없이 암송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9] 그 길었던 밤을 거친 뒤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니 온갖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문간에 기대어 가만히 그를 바라봤습니다.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묻고 싶었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짧은 미사가 끝나자 형제들은 다들 숙사로 돌아가고자 몸을 돌렸습니다. 무테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기도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정면의 장미창을 바라보던 그는 문가로 몸을 돌리자마자 그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게서 눈을 돌리고 빠르게 예배당을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고통스러웠습니다. 차라리 그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나를 무시했다면! 그랬다면 깜빡 잊어버렸다거나, 잠들었다는 식의 수많은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을 수라도 있었을 텐데, 혹은 한순간이나마 원망의 감정을 품기라도 해보았을 텐데! 그는 한숨도 잠들지 못한 양 지독히도 피곤한 낯으로 나를 보는 두 눈에 망설임과 죄의식을 내보임으로서 내게 그마저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나려 하고 있었지요. ……내가 그를 내버려두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결코 그를 놓아줄 수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그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어요.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와 대화할 수 있다면. 나는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아쉬움이나 불안감, 조각의 열화나 새로운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에서 움텄던 충동은 그 날의 일을 거치며 점점 눈처럼 불어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와 대면해야겠다는 열망으로 번졌습니다. 그가 나의 초대에 응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그의 불청객이 되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무테이의 방을 찾아간 것은 다음날 6시과가 막 지났을 즈음이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지, 아니면 나를 피하느라 바쁜지 그는 방에 있지 않았지만 별 상관은 없었습니다. 그와 나는 각자 방의 여벌 열쇠를 나누어 가지고 있으니 나는 그의 방에 들어가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습니다. 방의 문은 쉽게 열렸고, 그 안에 보이는 모습도 기억 속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방은 전체적으로 그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탁상 위에는 그가 만든 아티팩트와 연구 자료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 그의 산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익숙한 모양, 익숙한 필체, 익숙한 암호. 내가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예상했던 대로 그는 역병이 종식되기 이전부터 나름대로 연구를 이어나갔던 모양이었습니다. 한 장, 두 장, 종이가 넘어가며 글이 읽힐 때마다 그의 고민과 한탄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영과 혼과 육의 분리, 아카식 레코드에의 접촉을 위한 과정, 초월……. 군데군데 나조차 읽을 수 없는 내용이 쓰여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와 내가 오랫동안 함께 고민했던 주제들이었습니다. 과연 그 고난 속에서도 그의 놀라운 재주는 퇴색되지 않았던 터라 나는 한순간에 그의 글 속으로 끌려들어갔습니다.

때문에 무테이가 방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덜컥. 문이 닫힌 후에야 나는 뒤돌아 나를 바라보는 인영을 마주했습니다.

“아, 무테이.”

무테이는 내가 입을 떼자마자 표정을 굳혔지만 당황한 기색을 아예 감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까지 거부감을 드러냈으니 무턱대고 자신의 방까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겠지요. 그가 대놓고 거북한 표정을 드러내기 전에 나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대가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이곳에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어. 참 이상한 일이지, 방도 바로 앞에 있는데 통 마주칠 수가 없으니.”

“용건이 뭐야?”

“혹시 기분이 상한 걸까? 하지만 우리 사이에 서로의 방을 드나드는 건 아무렇지 않은 일이잖나. 장서관, 양호실, 지하실 어디에서도 그대와 이렇게 대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이렇게 방까지 찾아올 수밖에는 없었어.”

그는 나의 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하는가 싶더니 내가 지하실을 언급하는 순간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짓씹었습니다. 한순간의 일이었지만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용건이 뭐냐고 물었어. 나를 탓하기라도 할 생각이라면,”

“그럴 리가! 내가 어찌 감히 그대를 탓할 수 있겠어.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으리라 믿어. 암! 그저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내가 그대와 이렇게 만날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그래, 일단은 조각에 대한 이야기부터 할까.”

“조각?”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종전처럼 내 말을 끊을 생각은 없어보였습니다. 연구에 관한 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인내심이 그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나는 얼마 전 내가 알아낸 사실─나의 능력의 한계와 조각의 열화에 대해 그에게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몇 가지를 질문했고,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열화 정도나 수량에 대해서라면 탁자 위에 올려둔 종이를 참고하면 될 거야. 아무리 효능이 적더라도 없는 것보다야 나으니 앞으로도 복제는 이어나갈 생각이지만 그리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지.”

“턱없이 부족하군…….

“그렇네, 슬프게도! 혹 그동안 테오와 연락은 닿았나?”

그는 내가 건네준 자료를 적당히 훑어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언령도, 새들을 통한 수색에도 성과는 없었어. 적어도 이 근방에는 없는 게 확실하겠지.”

“그런가. 벗들의 안부도 궁금하고, 조각의 보충도 어서 이루어져야 할 텐데.”

무테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도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들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탁상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습니다. 아무리 그라도 그 정도 분량의 자료를 읽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자료를 읽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자료 자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습니다. 우리 둘 중 먼저 정적을 깬 사람은 무테이였습니다.

“할 말은 끝난 거겠지. 구태여 말을 전하러 찾아와준 것은 고맙다만 이제 그만 나가줘.”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건넨 말은 내가 기대했던 종류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테이, 자네야말로 할 말은 그것뿐일까?”

“무슨 소리야?”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 방에 서 있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이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대화를 끝내기를 원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나라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뜻에 맞춰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꼭 내가 이곳에서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계속해서 그런 반응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괴로운걸. 이렇게 둘이 만나는 건 오랜만인데 조금 더 있어도 되지 않겠나. 그간 밀린 이야기도 나눌 겸 말이야.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많네. 단순한 이야기라도 좋고.”

“아니, 됐어. 너무나 피곤해서 그럴 만한 체력도 남지 않았어. 당장이라도 쓰러지듯 잠들고 싶을 뿐이야.”

“그래? 아하, 그래서 그리도 냉정하게 굴었던 거로군! 좋아. 무리하는 건 좋지 않으니. 하지만 그렇다면 다음에는 언제 그대를 만날 수 있지? 이번에만 해도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 전날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어쩐지 이번이 아니라면 그와 다시 대화할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격정적인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같은 수도원에 머무른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지하실에는 왜 오지 않았나? 신호도 확인했고, 잠들지도 않았잖아. 나는 그저 묻고 싶을 뿐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대체 왜,”

“입 다물어!” 무테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끊었습니다. 내가 놀라 바라보자 무테이도 흠칫한 기색이었지만 다시 고개를 저으며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습니다. “시끄러워. 다 네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잖아. 웃기지도 않아……! 됐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피곤하다고 했잖아.” 나로선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즈음에는 나도 도저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되는대로 말을 지껄였습니다.

“모든 게 내 단순한 망상일 뿐이라면 차라리 그것이야말로 좋은 일이겠지! 그렇다면 그때처럼, 다시 한 번 내가 틀렸다는 증거를 보여줘, 안심시켜줘! 그토록 어려운 부탁인가.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나를─”

다시 바라봐줘.

그는 내가 방 안에 들어선 후로 단 한 번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시선을 피하는 것마저도 아닌, 내가 그 자리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천 번의 괴로운 말들보다도 그것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결국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강제로 그를 붙잡고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하고자 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그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지만 내게 남은 것은 만족도 환희도 아닌 오로지 충격과 후회뿐이었습니다. 얼빠져 있는 나를 그가 세게 밀쳐내어 벽에 몸이 부딪혔지만 찢어진 피부에서 느껴져야 할 아픔마저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너는 미쳤어.

분명,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다니.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려고 찾아왔나? 이제 만족해?” 멍해진 시각과 청각의 어드메에서 그의 말이 들려왔습니다. 짓씹듯 내뱉는 것도 같았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같았습니다. 아, 나는 대체 그에게, 나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아아, 무테이.” 겨우 입술 밖으로 말을 토해냈지만 볼품없이 떨리고 있다는 걸 나 스스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휘청거리며 다시 그에게 다가가 매달렸습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테고,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던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지? 대체 왜 나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제발 말해줘. 분명 자네가 만들어낸 또 다른 전개가 있을 테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어. 미진한 나의 능력으로는 자네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 없어……!”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예의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급기야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버리고 말았습니다.

“무테이, 너무도 달라졌어……. 내가 그토록 흠모했던 자네는 어디로 간 거지? 아, 이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비극적인 일이야.”

“역병 속에서 죽어 사라진 모양이지!” 무테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연히 소리쳤습니다. 그 표정에는 분노가 완연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비통함 또한 서려 있었습니다. “네가 그렇듯이 말이야. 며칠 전 I에게 L을 건네줬던 것 알고 있어. 정신이 나간 거지. 의학에도 마술에도 무지한 그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알고 있었음에도 눈을 돌렸던 거잖아. 너는 그를 살인자로 만들려고 했어. L의 완성에 눈이 멀어서! 이제 네게는 모든 것이 실험체에 불과해.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은 셈이라고.” 핏대가 선 그의 손목 아래에는 며칠 전 I에게 건네줬던 L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건……! 아니야, 무테이. 잠시만 내 말을─”

“그래, 네 말대로야. 달라졌지. 너도, 나도. 그래서 어쩔 셈이야? 네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라서 실망이라도 한 모양인데, 이제 내버리기라도 할 셈인가? 그것도 좋겠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한낱 나약한 인간 따위가 감히 구도자를 참칭하여……!”

“아냐!”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어 비명을 지르듯 부르짖었습니다.

“아냐, 아냐!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무도 지독하군, 무테이! 실망이라니, 내버린다니! 내가 어찌 감히 자네에게 그럴 수가 있겠어!? 그런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자네도 나도 너무 흥분한 거야. 우리 사이에 무언가 오해가 있었어. 그래! 그러니까 말했잖아. 이야기를 나누자. 그렇다면 분명…….”

“너와 더 이상 나눌 이야기는 없어.” 방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며 역정을 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결여된 말투였습니다. “이전이라고 너와 대화를 하지 않은 게 아냐. 거기에 대해서는 기억은 하고 있나? 그 때고, 지금이고, 듣지 않으려 하는 건 네 쪽이잖아. ……말했지. 오늘은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제 그만 나가주지 그래.”

“무테이,”

“적어도, 내 손으로 너를 쫓아내게 하진 말아야지.”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방을 나서자마자 문이 닫혔고, 한 번 닫힌 문은 다시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식사 시간에는 식당에서마저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무테이의 의도는 더더욱 알 수 없었습니다. 새까만 안개가, 수도원을 둘러싼 숲과도 같은 어둠이 우리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이가 그를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나를 이해했습니다. 그 날의 만남 이후로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고, 언제까지나 그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우정, 죄책감, 증오, 불신, 안타까움. 그의 표정에 담겨 있는 모든 감정이 나를 옥죄어왔지만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표정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을 때였습니다. 나는 점점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그가 의도적으로 표정을 감추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더 이상은 그의 여정에 동참할 수 없을까봐. 그리고 그가 우리들의 약속을, 이상을 잊고 다시는 구원의 길을 좇지 않을까봐.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다시 현자의 돌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조각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달라질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으로의 약속이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자 징표였습니다. 그리고 무테이와 나에게는 과거와 미래 모두로의 연결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닻. 조각이 있다면 무테이도 생각을 돌릴지 몰랐습니다. L을 제작하기 위해서라도, 무테이가 지고천을 향하기 위해서라도 조각은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나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좋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었습니다. 어차피 그는 축복 받고 저주 받아 죽지 못하는 존재였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나는 수도원의 다른 수사들 몰래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그를 찾았습니다. 나는 수도원을 떠날 수 없는 신분이었으니 전서구든 사람이든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어딘가에서 보낸 전서구가 내게로 날아왔습니다. 비둘기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쪽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보랏빛 머리의 청년이 근처의 마을에서 목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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