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 ― 中

8.

이제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었군요. 우리의 또 다른 벗, S와 R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테이와 내가 밤중에 도서관에 침입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을 즈음 두 명의 청년이 수도원에 찾아왔습니다. 둘 모두 로브를 걸치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딱 봐도 수사처럼 보이지는 않더군요. 아무리 행색이 남루해도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본질까지 가리기는 어려운 법인데다 한쪽은 단순 외적으로도 완전히 거한이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정체가 뭐든, 산간벽지에 위치한 데다 워낙에 폐쇄적인 수도원의 특성상 외부인이 찾아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침실까지 배정받은 걸 보아 수도원장의 허가가 있었다는 뜻인데 그 또한 의외였고요. 꽉 막힌 인사는 아니라고 하나 그렇게 흔쾌히 속세의 사람을 묵게 해주다니.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는 큰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자연스레 관심이 생겨 멀리서 흘끗 곁눈질을 하며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그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무언가가 익숙했지요. 분명 동급생은 아닐 텐데요. 그 때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맞은편 건물에서 빠져나오던 무테이도 복도를 거니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지그시 지켜보더군요. 잠시 기억을 되새기는 듯 하더니 곧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의아한 일이었습니다. 수사가 아닌데 무테이와 나 모두가 아는 이라니. 그렇다면 볼로냐에서 만난 이일 것이 분명한데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흐릿하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랜들 선생의 방 앞에서 두 명의 청년과 마주친 적이 있었지요. 그 때도 로브를 쓰고 있었고, 한 쪽은 보랏빛 머리에 다른 한 쪽은 몹시 키가 컸습니다. 분명 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자신들을 향한 시선을 눈치 챈 건지 두 청년이 이쪽을 바라보더군요. 아차 싶어 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는지, 키가 큰 청년 쪽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대놓고 공격적인 어투인데다 워낙에 체격이 커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습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지?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도록 해.”

“와악, 잠깐, 잠깐만요! 오해입니다!”

“아니, 잠깐 진정해요! 여긴 수도원이고 저 사람들은 수사라고요. 루─.” 체격이 작은 청년 쪽이 당황하며 그를 막으려 들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너는 가만히 있어봐.”

완전히 난장판이었죠. 나는 그가 혹시나 내 멱살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침을 삼켰습니다. 그때 저 멀리에 서 있던 무테이가 어느새 바로 곁까지 다가와서는 나를 잠시 쏘아보더니 청년들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렇게 소란을 피워봤자 더 남들의 눈에 띌 뿐입니다. 진정하시지요. 아니면, 적어도 자리라도 옮기든가.”

“음.” 체격이 큰 청년이 그 말을 듣고는 주변을 곁눈질했습니다. 몇몇 수사들이 이미 이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쯧, 혀를 차며 나에게서 몇 발짝 떨어졌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눈앞의 청년 바로 옆에서 쩔쩔매던 또다른 청년도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대를 타박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렸잖아요!”

“내가 성급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결례는 그쪽에서 먼저 저질렀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L, 네가 직접 설명해.”

“아, 응! 결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익숙한 얼굴인 듯해 바라보았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혹 몇 년 전에 볼로냐를 찾은 일이 있지 않으셨는지?”

“볼로냐……? 아, 그래. 하지만 나는 당신들을 본 기억이 없는데.”

“당연합니다. 우리도 랜들 선생의 거처 앞에서 당신들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그에게 사사했습니다.” 무테이가 대답했습니다.

“랜들 선생의? ─그러고 보니 이곳에 제자가 둘 있다고 했던가. 분명 둘 다 동양인이라서 알아보기 쉬울 거라고…….”

그는 무언가 기억난 듯 그렇게 말하다가 말을 흐리며 우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

“…….”

“……이거 실례했군.”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럼 피장파장으로 합시다. 아, 대신 저희도 말 놓아도 되나요?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뭐? 넉살도 좋네. 마음대로 해.”

“좋아! 그럼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까. 나는 L, 보이는 대로 이곳의 수사야. 양호실을 담당하고 있지. 볼로냐에서는 랜들 선생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

“M. 번역가 겸 학자다. 마찬가지로 랜들 선생께 가르침을 받았어. 그쪽은?”

“나 참. 벌써부터 일이 꼬여버렸군. 나는 R, 이쪽은 S다. 랜들 선생과는 집안 문제로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어. 사정이 있어서 잠시 이곳을 찾았다. 아마 한동안은 신세를 질 것 같군.”

“흐음. 그렇군! 알겠어. 그럼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잘 쉬게. 직접 안내해주고 싶지만 슬슬 농땡이 피우기도 눈치가 보여서 말이야. 그래도 뭔가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를 찾아와! 나는 양호실, M은 필사실에 있을 거야.”

R과 S은 필사실이라는 말에 언뜻 흥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들과의 두 번째 조우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나는 양호실에 머무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무테이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몇 번이나 필사실 쪽으로 찾아와서 사서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사서와 나눌 만한 이야기는 책에 대한 것밖에 없을 테니 어쩌면 그들도 우리처럼 장서를 노리고 이곳을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전에 나눈 대화를 생각한다면 랜들 선생의 조언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으니까요. 그쪽도 마술에 대한 책을 찾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의 우리처럼 시원찮은 결과와 마주한 그들이 곧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상한 청년들이 수도원에 머무른 지도 며칠이 지나자 차츰 필사실 외의 공간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로브를 쓴 채였지만 수도원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기에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습니다. 어차피 양호실에만 있어봤자 할 일도 없으니 귀한 손님들에게 수도원의 구조라도 알려주겠다면서요. 그들도 따로 거절하지 않고 호의를 받아들였습니다. 타인을 꽤나 경계하는 눈치긴 했지만 랜들 선생에 대한 극진한 신뢰가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모양이었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수도원을 함께 거닐었습니다.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짧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우리는 꽤나 죽이 잘 맞았어요.

며칠이 지나자 그들도 조금씩이나마 마음을 열어가는 듯했습니다. 무테이도 일과를 끝내고 나면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요. 수도원이란 무릇 정적으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우리 넷이 함께할 때만큼은 분명 활기가 존재했습니다. 넷 모두 성격이며 체격, 출신지를 비롯하여 많은 것이 달랐지만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둘이 함께했던 생활이 넷이 함께하는 것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미사를 보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지만 큰 상관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그들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 날도 무테이와 나는 그의 방에 나란히 앉아 몰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답하지 않자 잠시 후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야. 하고 덧붙이는 말이 들렸습니다. S의 목소리였습니다. 무테이가 다가가 문을 열자 함께 서 있는 S와 R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로브를 벗은 채였지요. 덕분에 S의 한껏 긴장한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반면 R은 S에 비해 태연해 보였습니다. 조금 예민해 보이긴 했지만 수도원에 도착한 후로 그는 늘 그런 표정을 지었으니 평범한 표정인 축에 속했습니다.

“얘기할 게 있어서. 일단 들어가도 될까.”

무테이는 예상외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선을 던졌습니다. 괜찮지? 그렇게 묻는 그에게 나도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상관없어. 그런 의미였지요.

S와 R은 슬금슬금, 그리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잠시간 말없이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더니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습니다.

“너희들, 랜들 선생의 제자라고 했지. 듣기로는 그쪽 방면으로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던데. 맞나?”

R의 말에 이번에는 무테이와 내가 시선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명백했지요. 우리는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씨익 웃음을 지었습니다.

“잘 찾아왔어.”

그렇게 우리들의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처럼 긴 밤이었지요.

S와 R는 우선 세례명이 아닌 자신들의 본명을 밝혔습니다. 각각 테오─아니, 세오도아, 루메르트라고 하더군요. 둘 다 귀족가의 자제로 집안 사이에 연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여러 사연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몇 년 전, 세오도아와 그의 집안 식솔들 일부가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몰아친 폭우로 인해 강의 급류에 휩쓸려 대부분이 죽거나 실종되었지요. 실종이라고는 해도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일 뿐 사실상 전원 사망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습니다. 세오도아도 실종자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또한 죽었으리라 생각하며 애도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며칠 뒤 근처 마을에서 세오도아가 발견되었습니다. 사건의 충격 때문인지 기억을 전부 잃은 채였지만,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남지 않았습니다.

세오도아를 발견하고 그의 집안은 난리가 났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요.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그들은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신의 선물, 기적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때마침 그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사실도 깨달았는데: 그 사건 당시, 마차가 운반하고 있던 물품들 중 한 가지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단순한 물건의 분실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의 물건이 그의 집안이 어마어마한 품을 들여 소장하고 있는 여러 성유물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름은 ■■ ■■■라고 하더군요. 헌데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루메르트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것의 영향이 맞을 수는 있지만, 성유물이라니 웃기는 일이지. 이 녀석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알아. 그건 그냥 보석이야. 아마도 청금석이었던가. 그게 성유물일리가 없지. 나는 마술사는 아니어도 랜들 선생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는 식견이 있는데, 굳이 따지면 성직자들보다는 차라리 너희 연금술사들이랑 상성이 더 맞을걸.”

“일단은 우리도 성직자지만 말이지.”

여하간 그의 집안에서는 그 성유물로 인해 기적이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 또한 그 문제의 성유물이 진정한 성유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만 그 사실을 제대로 공표할리는 없었지요. 어쨌든 실물도 사라졌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의 가족들은 잔뜩 흥분해서는 교회에 보고를 해야 한다느니, 교황청에 직접 일러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한편 정작 당사자인 세오도아는 영문도 모른 채로 루메르트에게 던져져 있었습니다. 세오도아의 형과 아버지가 루메르트에게 그를 맡겼던 것입니다. 졸지에 그를 떠맡게 된 루메르트는 그 나름대로 골머리를 썩는 중이었습니다. 기껏해야 몇 번 만나봤을 뿐인 친구─그것도 기억을 잃은─를 맡았다는 사실 자체도 그다지 기껍지 않거니와 그 친구의 상태라는 게 아무리 봐도 수상쩍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루메르트는 양측 가족들의 눈을 피해 몰래 볼로냐까지 찾아가 랜들 선생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워낙에 모호한 상황이다 보니 그도 명확한 대답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것이 기적이라는 말로 단순하게 결론이 날만한 문제는 아니라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세오도아의 일 또한 성聖의 영역에 있는 동시에 마술적인 영역에 있었던 것이었지요.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설령 그를 둘러싼 일들이 오롯이 성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교황청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모르며, 설사 교황청에서 기적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세오도아의 가족들에게야 명예며 영광이겠지만 그 본인의 삶은 그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이 자명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집안 내부에서 논쟁이 격화되면 격화될수록 그의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습니다. 계속해서 세오도아를 지켜보고 있던 루메르트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요.

결국 그들은 가족들이 저들끼리의 논쟁에 정신이 팔린 사이 몰래 집안의 장물을 챙겨 도망을 쳤습니다. 곧 교황청을 찾아가기로 결정을 내린 세오도아의 형과 아버지가 루메르트를 찾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지요.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요컨대, 둘이 눈 맞아서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거지?”

“넌 수도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냐?”

루메르트와 세오도아는 질린 듯한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따로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의 도피라는 말이 그리 틀린 설명은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뭐, 어디까지나 질 낮은 농담이었지만요. 하지만 세간에서는 이를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하지 않았겠지요. 이 사건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실제 사실과는 관계없이 가장 천박하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될 것이 뻔했습니다. 가령 s로 시작해서 y로 끝나는 단어[6]를 들먹이면서요. 그리하여 두 사람의 집안에서는 고의적으로 사실관계를 뒤섞은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 소문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있어. 분명 ‘사고로 정신이 이상해진 리들 가의 삼남이 재산을 노리고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는 성유물과 함께 오토마이어 가의 장남을 납치해 도주했다’ 라는 내용이었지.” 무테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 귀에까지 들어갔나. 하긴 볼로냐에는 소문이 퍼졌을 만도 하네.”

“엇, 그럼 혹시 처음 두 사람과 스쳐지나갔을 때 계속 그쪽을 바라봤던 게 그것 때문인가? 이미 그때부터 누군지 눈치 채고 있었어?”

“대충은. 확실한 건 아닌데다 나와 관련된 일도 아니니 가만히 있었지만. 보랏빛 머리가 그리 흔한 건 아니잖아?”

“으, 역시 머리를 물들이기라도 해야 하나.”

“물들여봤자 금방 빠지잖아. 아서라.”

이후 두 사람은 집안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벌써 몇 년이라 떠돌이 생활에는 이미 익숙해졌다고들 했지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몸에 익은 귀족가 자제로서의 행동을 버리려면 한참은 더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모종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둘 모두 문제의 사건에 대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세오도아의 특수한 체질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이는 몇 년 전에 겪은 사고, 그리고 그 때 실종된 보석 ■■ ■■■의 영향임이 분명했습니다. 그 후 둘은 본격적으로 세오도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그 실종된─그리고 이 모든 일을 초래한─보석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로 인해 생긴 세오도아의 특수 체질은 정확히 어떤 것인지, 그걸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그리고 잊어버린 기억을 찾을 방도는 없는지. 세오도아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갈무리했습니다.

“해서, 랜들 선생의 자문을 구해 온갖 장서가 다 모여 있다는 이곳까지 찾아온 건데 설마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싹 다 꽁꽁 감춰놓고 있을 줄은 몰랐지. 이럴 거면 위험을 감수하고 가문의 이름을 판 보람이 없잖아.”

“뭐어, 아무래도 수도원 입장에서 마술서 같은 걸 쉽게 보여줄 수는 없었겠죠.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만 말이야. 너희는 뭐 아는 것 없어? 듣자하니 너희도 장서를 노리고 이곳에 들어온 거라면서.”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으니 무테이와 나는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루메르트가 무언가 핀잔을 주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지요.

“말했잖아. 잘 찾아왔다고.”

말이 끝나자마자 무테이가 베개를 들어 그 밑에 숨겨둔 비서秘書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연히, 마술에 대한 것이었지요.

“허어.”

그 모습을 보고 루메르트와 세오도아는 헛웃음을 쳤습니다. 반쯤은 어이없다는 듯, 나머지 반쯤은 기대감이 어린 듯한 표정을 짓고서요.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네.”

다음날 우리는 아침기도가 끝나자마자 양호실로 향했습니다. 지난밤 긴 이야기를 마치고 무테이의 방을 떠나면서 세오도아와 루메르트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적이 드문 시간, 양호실에서인 편이 좋겠다면서요. 무테이와 내가 기대에 찬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곧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설마 바로 불러들일 줄은 몰랐는데. 너희는 피곤하지도 않아?” 세오도아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습니다. 루메르트는 몇 발짝 뒤에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이 아닌 이상에야 지금이 가장 인적이 드문 시간이니까. 피곤하다면 나중에라도 괜찮아.”

“아냐, 됐어. 맞는 말이기도 하고, 연구를 위해서라도 빨리 보여주는 편이 낫겠지. 으음.”

그러면서 세오도아는 내게 몇 가지 도구를 준비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지요. 준비가 끝나자 그는 다시 한 가지를 부탁해왔습니다. 지금 본 광경을 누구에게든 이야기하지 않겠노라 약속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신과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자, 그는 심호흡을 하더니 도구를 쥔 손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이미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한 몸이니 내가 본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대가 나의 고해를 듣더라도 그 내용을 누설할 수 없듯이.

하지만 설사 내가 맹세를 깨고 말을 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내가 본 것을 사실 그대로 말하더라도 당신은 믿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본 무테이와 나조차도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으니 말입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우리의 표정에서는 웃음기가 완전히 가시고 혼란과 경악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이 또한 당신에게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이어진 세오도아의 말은 더욱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는 잠시간 말이 없었습니다. 방금 전에 보고 들은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겨우 의심이 가시자 혼란은 감탄과 흥미로 바뀌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온통 영혼을 빼앗겨버렸죠!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완전히 생각 속에 빠져든 무테이─그때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를 대신해 정적을 깬 것은 나였습니다.

“이거 놀라운걸! 왜 기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겠어.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만해. 그런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니까. 하지만…… 아, 정말이지 흥미롭군!” 그리 말하고 뚫어져라 세오도아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런가. 저기, 그래도 남을 그렇게 실험체 보듯이 하지는 말아줄래.”

“이런, 미안!”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루메르트가 물어왔습니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어느덧 상념에서 빠져나온 무테이가 말을 꺼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분한 어조였지만 말에 힘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테오도르, 루메르트. 너희는 무엇을 바라는 거지?”

“말했잖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고. 가능하면 기억도─”

“그런 것 말고.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야. 나는 최종적인 목표를 묻고 있는 거야.”

무테이의 이어진 말을 듣고 세오도아와 루메르트 모두 멈칫하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아니면 평범한 인간이 되고 싶어?”

“그런,”

세오도아가 순간 울컥한 듯 무테이를 쏘아봤지만 무테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세오도아는 잠시간 침묵한 뒤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면서도 확신을 갖고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원래대로라는 건 잘 모르겠어. 이전의 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러니 일단은 그저 알고 싶을 뿐이야. 나에게 일어난 일이든, 이전의 기억……이든. 그 본질이 축복이든 저주든 간에, 이 형질에서 벗어나 평범한 인간이 될 수만 있다면 그 편이 가장 좋겠지. 그저, 이런 건──.”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해.”

무테이가 세오도아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몰아붙이려던 게 아니야. 생각을 듣고 싶었던 것뿐이지. 우리도 너희에게 협조할게. 우리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 아니, 우리 이전의 누구라도 이런 경우를 목격한 적이 있을까. 그러니 어떤 결론도 쉽게 내릴 수는 없지만 그만큼 흥미롭기도 해.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고 너에게서 분리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지. 어디까지나 일차적인 목적은 테오도르 너를 위한 것, 이지만.”

“맞아! 어쩌면 그 과정에서 우리도 많은 수확을 얻어낼 지도 모르는 일이야. 누가 알겠나, 우리가 랜들 선생님을 통해 이어져서 만나게 된 것도 신의 안배일지! 그러니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할게. 그렇지?” 내가 재빨리 말을 잇자 무테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어쩐지 석연찮지만, 알겠어.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를 믿을게.” 세오도아는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습니다. 나는 다시 그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지요.

“얘기 끝났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루메르트가 말을 꺼냈습니다. 훼방을 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하여간 마술사란 족속들은. 그놈의 호기심이니 학구열이니 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본인이든 타인이든 전부 다 이용하려 들지. 상처를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하하, 차마 반박은 못하겠군.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이 녀석 말대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선만 넘지 말라고. 그 선이라는 게 얼마나 넘기 쉬운 건지 너희도 모르지 않잖아. 아니, 누구보다 잘 알겠지.”

무테이와 나는 말없이 웃으며 루메르트에게 악수를 건넸습니다.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내심 이미 그 선은 넘은 지 오래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루메르트와 세오도아는 그 뒤로도 한동안 수도원에 머물렀습니다. 가문의 이름을 팔았다더니 확실히 수도원장 측에서도 잠잠하더군요.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돕는 우리에게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아마 둘이 도망칠 때 집안에서 빼왔다는 장물도 좀 찔러줬으리라고 짐작합니다. 당시 수도원장은 어지간한 속물이었으니까요.

그 덕에 우리는 확보된 잠시 간의 시간동안 세오도아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세오도아와 루메르트는 우리가 한밤중에 도서관에서 몰래 빼돌린 금서들을 읽어가며 세오도아의 사례와 대조했고, 나와 무테이는 양호실에 둘러앉아 세오도아에게서 채취한 혈액이나 머리카락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때로는 세오도아의 몸을 직접 관찰하고 실험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실험은 아주 세밀하고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환자이자 우리들의 친구였으니까요.

실험은 다양한 방면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는 마술적인 것도 물론 존재했습니다. 수도원은 마술을 행하기에 그리 적합한 공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나 혼자 관리하는 양호실에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락되는 편이었기에 일정 수준까지는 무리 없이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몇 가지 수확이 있었습니다. 한정된 시간 동안 그다지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해도 그 사실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수확은, 세오도아와 함께 실종되었다는 그 보석의 성질이 그대로 그에게 인계되었으리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만─ 마치 그가 보석 그 자체인 것 같았지요. 물론, 그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인간 말입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 내부에 지닌 성질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당신 또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가 인간의 배 속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중 누군가는 성聖의 영역에 있고 누군가는 마술의 영역에 있듯이, 누군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다 죽을 뿐이지만 누군가는 거대한 이상을 꿈꾸며 가련한 인간들을 한층 더 높은 영역으로 이끌듯이! 단적으로, 주님께서도 성모의 몸에서 태어나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배고픔과 피곤을 느낄 줄 아는 육신을 입으셨지만 그 본질은 지고한 말씀이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측면에서 세오도아 또한 범인들과는 달랐습니다. 아주 명확하게요. 신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모든 존재를 사랑하시지만 그는 특히나 더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커다란 나머지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감히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말입니다. 우리가 보았던 기적은 그 증거였지요. 그에게 주어진 덕성德性이 신의 사랑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천국의 문을, 그 열쇠를 보았습니다.

또 한 가지의 커다란 수확은 조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일종의 조각을 추출해낼 수 있었습니다. 특수한 조건 하에서 그의 혈액을 응고시키고 여러 공정을 거치면 되는 것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의 성질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마술에 반응하였으며, 무한한 변성의 가능성을 지닌 동시에 세오도아의 일부로서 신의 사랑을 끌어들이는 촉매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대는 이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만큼이나 그 중대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허나 성직에 몸을 담고 있는 마술사라는, 존재 자체가 아이러니인 우리는 똑똑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루메르트와 세오도아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어 갔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성과가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형태이든 간에요. 그들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겠으나 그 짐작이 명확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하자 초조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운 모양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그럴 때면 세오도아는 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고 루메르트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하다 못해 완전히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세오도아를 위해서라는 목적도 물론 중요했지만 우리는 점차 그와 그의 조각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 자체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메꿀 수 없던 공백을 채우게 하고,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직감의 형태로나마 이것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세오도아와 루메르트가 도움을 청해온 이유를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목적과 그들의 목적은 전면적으로 배치되지 않았으니 연구는 나 자신과 그들 모두를 위해 진행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우리들 넷이 보낸 나날은 분명 행복했습니다. 이는 세오도아와 루메르트가 수도원을 떠나는 날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떠나기 전 우리는 다같이 비좁은 방에 둘러앉아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순간도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만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바쁘게 실험을 진행하고 책을 읽는 와중에도 웃음이 있었고 우정이 있었습니다. 아, 그 나날들의 기억은 여전히 나를 지탱해주는 동시에 옥죄어오고 있습니다.

다음날, 조과를 마치고 떠날 때가 되자 무테이와 나는 그들을 강하게 껴안으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올게. 자주는 못 오겠지만, 전서구를 이용하면 연락은 할 수 있겠지.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랜들 선생님께 대신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선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수도원의 문을 빠져나갔습니다.

무테이와 나는 한동안 그곳에 멈추어 서서 그들이 숲으로 들어가 더 이상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이후로 몇 번을 더 수도원에 찾아왔습니다. 때로는 봄에, 때로는 여름에, 혹은 가을이나 겨울에. 몇 년이 지나도 우리는 언제나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연구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곧 그 결실이 눈에 보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거대한 죽음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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