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 ― 中

10.

이곳까지 역병이 밀어닥친 것은 그 다음해의 봄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가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다 겨우 발걸음을 뗀 봄바람은 새로이 피어나는 새싹이며 꽃들보다도 저물어가는 생명들의 소식을 먼저 몰고 왔습니다. 겨우내는 물론 봄에 접어들어서까지 남부의 항구에서 시작되었다던 지독한 역병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들려왔습니다. 역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강의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이탈리아 전역의 항구로 퍼져나갔고 그 근처의 마을들까지 전부 몰살시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추위와 두려움 속에서도 멀리 사는 가족들과 벗, 형제들을 걱정하며 기도하였으나 그것은 분명 희망의 불씨를 품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 하지만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절망에 비하면 그 불씨는 얼마나 연약했는지!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감히 희망조차 품지 못했을 것입니다.

E마을, F도시, V마을, S마을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병마에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와야 할 시기가 되어서도 전해지는 것은 바로 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죽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뿐이었습니다. 고열과 함께 겨드랑이나 목에서 종기가 발견되면 곧 각혈을 시작하고 사나흘 안에 사망한다더라, 병자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병에 감염된다더라, 그렇게 수많은 마을이 전멸했다더라. 소문의 내용은 너무나도 끔찍하여 도리어 현실감이 결여될 정도였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 공포의 싹을 틔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나와 무테이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양호실의 약재를 몇 번이고 점검했지만 사실 우리에게도 마땅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외상이나 가벼운 병이면 모를까 이번 역병처럼 전파력도 강하고 무조건적으로, 그것도 사나흘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죽음에 이르는 병은 천여 년 전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래로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병의 치료법은 물론이고 그 원인조차 모르는 우리들은 한없이 무력했습니다. 일반적인 약초며 약재들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고 오로지 답은 연구 중인 엘릭서─즉 L에 있었습니다. 조각의 산물은 그 놀라운 효능만큼이나 위험성도 부담해야만 했기에 무테이는 L의 사용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의견을 내비쳤으나 지금 당장 아카식 레코드에 접촉하여 현실을 개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마땅한 대안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겨우내 다른 모든 연구를 접어두고 L의 제조에만 몰두했지만 봄이 될 무렵까지 얻어낸 결실은 그 원료가 되는 물질을 간신히 추출해내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분명 엄청난 성과였으나, 약과 독은 한 끗 차이인 법이니 정제되지 않은 L의 원료는 약보다는 차라리 독에 가까웠습니다. 약의 실험을 위해 그 희석액을 쥐나 작은 동물들에게 극소량 복용시켰지만 그 중 상당수가 몸이 뒤틀리는 등 가시적인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죽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독을 약으로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었지만, 바로 시간이야말로 주어져있지 않은 단 하나였습니다.

역병이 전역을 휩쓰는 와중에도 외부로부터 수도원을 보호해주던 강건한 벽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부활절이었습니다.

아무리 역병이 창궐하였다 해도 축일은 축일. 부활절을 몇 주 앞두었을 시기 수도원장은 사제들을 회의실에 불러놓고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 주변의 영지로부터 지원을 받겠노라 이야기했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요. 역병의 마수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도망치려면 차라리 아예 수도원을 봉쇄하고 내부의 자원을 이용하여 간소하게 축일을 보내는 편이 나았습니다. 허나 수도원의 거의 모든 이가 차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끔찍한 병이라고는 하나 아직까지 주변의 마을에서는 문제의 병이 보고된 적이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 안이한 마음, 그리고 대축일을 지키지 못하면 신의 진노가 내릴 것이고, 제대로 지켜낸다면 기뻐하신 주님께서 수도원과 영지들을 보호해주시리라는 허황되고도 달콤한 믿음이 수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판단력을 흐리고 있었습니다. 무테이와 나는 탄식하며 의견을 함께하는 일부 수사들과 함께 수도원장을 찾아가 봉쇄를 제안했지만 우리들의 의견은 대수롭잖게 묵살 당했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수도원장의 방을 빠져나오면서 무테이가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 또한 거기에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마을에 역병이 보고되고 나서 주의해봤자 늦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수도원에 병이 퍼지고 난 이후겠지요.

며칠이 지나자 마을에서 보낸 음식과 인력들이 차차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년에 비하면 대폭 축소된 규모를 보고 조금쯤은 안심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습니다. 허나 우리의 심정이 어떻든 부활절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한동안 수도원의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나무 장식물을 깎고, 스테인드글라스를 교체하고, 달걀을 준비하고, 성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러는 며칠간은 역병에 대한 공포조차 잊은 듯 했고 수도원 전체에 기이한 평온함이 감돌았습니다. 폭풍우가 치기 전날 밤의 안온함이 꼭 그런 모습이었겠지요.

부활절 당일에는 수도원에 대략 일흔 명 정도의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우리 수사들이 예순 명, 조금씩 도착한 외부의 인력이 열 명 정도였지요. 그만한 사람들이 다 같이 힘을 모은 시간이 무색하지 않게 축일은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전례부터 미사, 만찬까지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그간 몸의 이상을 보고하는 이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눈에 띄게 안심한 모양새였습니다. 수도원장은 거봐란 듯이 흡족한 미소를 띠고 나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예상이 틀렸다면 그만큼 다행인 일이 없었습니다.

미사를 무사히 마치고 다음날 아침기도가 끝날 즈음 마을에서 온 일꾼들이 떠나갔습니다. 여전히 특별히 눈에 띄는 증상을 보이는 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태가 별반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이 병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피로와 숙취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해답은 무정하게 흘러가는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었습니다. 나는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도 이틀간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수사 한 명이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이는 삽화가인 A였습니다. 그를 부축해온 이들에 따르면 아침부터 혼란한 기색을 보이다가 9시과가 조금 지나 필사실에서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그 덕에 빠르게 양호실로 데리고 올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양호실을 찾아온 이들 중 무테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다행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병자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빠르게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부디 내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습니다.

양호실의 침대에 뉘인 A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습니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고 입 사이로 보이는 혀는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옷을 벗기려 들자 그가 갑자기 희번득하게 눈을 치켜뜨더니 비명을 내지르고 발버둥치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하게 천으로 그의 입을 막았지만 양호실 전체에 그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A가 발작을 시작하자 뒤에서 불안한 듯 지켜보던 수사들이 놀라 다가와서 그의 몸을 눌러 고정해주었습니다. “miserere nobis!” 그는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수사들이 몸을 지탱해주는 동안 나는 서둘러 칼을 잡아 그의 옷을 잘라 벗기고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발진은 따로 보이지 않았지만 겨드랑이에 종기가 맺혀 있었습니다. 크기는 달걀만 했고, 색은 선홍색이었지만 점점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의 피부는 이미 보라색, 검은색으로 얼룩덜룩해진 상황이었고요. 피하고 싶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분명 청색병이었습니다.

양호실 밖까지 새어나간 A의 비명소리를 듣고 저 멀리서 수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막 양호실에 들어오려고 할 즈음 무테이가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청색병이지?” 그가 물었습니다. 질문이라기에는 단정적인 어투였습니다. 옆의 수사들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콜레라나 장티푸스도 아니고 종기에 고열, 착란까지. 문제의 역병밖에는 없겠지. 우리야 이미 어쩔 수 없다 해도, 다른 수사들이 A와 접촉하게 해서는 안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A는 물론이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필사실에 있었던 사람들, 아니, 수도원 전체가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순간 문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느새 수도원장까지 바깥의 사람들 무리에 합류해 있었습니다. 당장 문을 열라고 하는 목소리에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필사실에 있었던 수사들 중 누군가가 그에게 정황을 설명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문을 단단히 가로막고 그를 진정시킨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A가 청색병에 감염되었고 더 이상 아무도 그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물론이고 필사실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간 A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이미 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며칠간은 모두 독방에 격리되어야 한다……. 당장 어제까지 다함께 생활했으니 이미 퍼질 대로 퍼졌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직접 A를 살펴보아야겠다며 막무가내로 문을 밀고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소란 속에 문의 잠금이 느슨해질 즈음 다시 A가 발작을 시작했습니다. 비명은 여전히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웠고,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드문드문 튀어나오는 라틴어뿐이었습니다. 그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주의 자비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무테이와 함께 A를 데려왔던 두 수사는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잔뜩 겁을 먹은 나머지 통 그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아 우리 둘이 그를 제압해야만 했습니다. 그를 진정시키기까지 또 기나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착란에 빠져 말도 안 되는 힘을 쏟아내는 이를 제압하는 일은 도통 쉬운 일이 아닌지라 마침내 A가 지쳐 쓰러지고 나서야 겨우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쯤엔 무테이와 나도 완전히 녹초가 되어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문이 위치한 벽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 너머에 서 있을 수도원장은 한동안 조용하더니 잠시 후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우리에게 확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그가 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에 하나 잘못된 판단이라 하더라도 역병이라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일 터였습니다.

수도원장은 웬일로 대답을 듣자마자 즉시 수사들을 물리고 우리가 말한 대로 행했습니다. 수도원 전체에 한동안은 공동 취식과 노동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졌고 A는 양호실에, 무테이와 나, 함께 있던 두 수사는 각자의 방에 격리되었습니다.

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습니다. 양호실에서는 긴장과 초조함으로 온통 경직되어 있던 감각이 독방에 격리되고 나서야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제야 상황이 실감되었습니다. 방에 도착하고 나서도 A의 모습이 한참동안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종기와 착란, 비명. 몇 번을 곱씹어봐도 그것은 분명 청색병의 증상이었습니다. 상황은 암담했습니다. 빠른 발견과 대처가 병의 확산세를 어느 정도 늦출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감염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A는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히─그러나 그 병을 몸에 품은 채로─ 필사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삽화 작업을 하고 있었고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A와 접촉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가 어째서 감염되었는가도 문제였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부활절 미사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예측이었는데 이 경우에는 훨씬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운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영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수도원에 처음 발을 내딛기도 전인 어린 나날 마을에 병이 돌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었던 일, 볼로냐 대학 시절 갑자기 모습을 감춘 몇 명의 동급생이 병에 걸려 시체로 발견되었던 일, 그 앞에서 무력했던 아버지와 교수들, 그리고 나, 불완전한 L을 복용하고 뒤틀린 채 죽어가던 쥐들, 불과 며칠 전 다함께 먹고 마셨던 부활절 미사, 필사실에서 쓰러진 A, 커다란 선홍색 종기와 비명, 그를 부축하고 들어오던 두 수사, 그리고 무테이…….

나는 두려웠습니다. 수도원의 모두가 몇 달 만에, 짧으면 몇 주 안에 죽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습니다. 일찍 죽은, 그나마 운 좋은 이는 수도원 뒤편의 묘지에라도 묻힐 수 있겠지만 뒤늦게 목숨을 잃는 이는 형제들의 시신에 둘러싸인 채 땅바닥에 방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 시신 중에는 수도원장도, A도, 두 수사도, 나도, 무테이도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갔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은 결단코 없었으나 실제 나는 독방에 갇혀 있었고,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수단인 L은 불완전했으며, 그마저도 양호실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격리는 분명 그 상황에 내릴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이었고 양호실을 빠져나오면서 수사들의 눈을 피해 L을 함께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최선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감히 재앙에 대적하고자 한다면 범인凡人의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했습니다. 무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도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며칠이 지나 격리가 해제되면 양호실에 접근하거나, 몰래 독방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L을 손에 넣어서 연구를 이어나가거나, 혹은 직접 복용하려 들거나.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습니다.

언제라도 그가 원하는 바를 위해 목숨마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뜻대로 진행되게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와 나, 그리고 우리의 이상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든 무테이를 가장 안전한 독방에 묶어놓은 채 양호실─L에 접근하여 그가 L을 복용하기 전에 실험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실험체는 충분했고 실험의 필연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계속해서 늘어날 병자들은 L의 부작용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어차피 죽음에 이를 운명이었고, 나는 예상되는 L의 반동에 저항할 수 있을 만한 인자와 의지를 가진 적당한 실험체였습니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 또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며, 만일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실험의 사례로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기처럼 나를 감싸던 섬뜩한 두려움 사이에서 일말의 희망, 희열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시신을 짓밟고서라도 마땅히 살아남아─ 십여 년 전 나에게 그러하였듯, 이 세상에 다시 구원을 가져올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대의 어둠 속 유일한 등불이 되어주었습니다.

비정한 무대는 이미 마련되었고, 남은 것은 이 독단에 함께 어울려 줄 배우들이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변수가 남아있었지만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씩 진정되는듯했습니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었고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곧 기절하듯 잠에 들었습니다.

그날은 끔찍한 꿈을 꾸었습니다. 저 멀리 숲에서 떠나와 매일 밤 나의 귓가를 간질이던 새의 울음소리는 악마의 음성으로, 막 새싹이 돋아나던 푸르른 화단은 잿빛의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평온하던 수도원은 푸르스름한 말을 탄 기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죽음이라는 허무에 집어삼켜졌습니다. 나는 폐허가 된 수도원에 홀로 남아 시신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 모든 것이 거짓이기만을 바랐습니다.

조과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꿈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몸과 침대는 식은땀에 젖어 완전히 축축해져 있었고 오한이 느껴졌습니다. 서둘러 온몸을 확인해봤지만 다행히도 역병의 증세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창문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한기와 식은땀으로 인해 추위를 느꼈던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몸을 닦았습니다. 불쾌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지만 지난밤의 꿈은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다시금 종소리가 수도원 전체에 울려 퍼졌습니다. 나는 관성적으로 눈을 감고 시편을 외웠지만 머리는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복잡했습니다.

7편 즈음을 외웠을 무렵 독방 앞에 빵과 치즈를 가져다놓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감시자라기에는 지난밤의 그것과는 다른 감각이었기에 암송을 잠시 멈추자 문틈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습니다. “나입니다.” 잔뜩 목이 잠겨있어 알아듣기 어렵긴 했어도 분명 수도원장이었습니다. 마침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쓴 각본의 조역으로 움직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그는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한껏 낮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대들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하고요.

그의 말에 따르면, 밤사이 두 명의 사제가 비슷한 증상을 보여 A와 함께 양호실에 격리되었다더군요. 듣자하니 반쯤은 강제로 들이밀어진 모양이었습니다. A의 경우 병색이 없는 사제 중에는 양호실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는 이가 없어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보나마나 상태가 훨씬 심각해졌을 것이었지요. 막 격리된 두 사제도 이대로라면 A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고요. 한편 그는 조금 전 막 종이 울리기 시작할 때 마을에서 전령이 찾아와 편지를 전달하고 황급히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직접 읽어보는 게 낫겠다며 문의 틈새로 편지를 넣어주었습니다. 나는 소리 내어 편지를 읽었습니다.

‘존경하는 수도원장님께 …… 지난 부활절, 수도원에 다녀간 일꾼 중 세 명이 사망했고 일곱 명이 위독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소문의 역병으로 보입니다. 수도원의 상황은 괜찮습니까? 신께서 보호하셨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을에 병이 내린 것은 어째서입니까? 축일은 완벽하게 치러졌을 터입니다. …… 부디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뒤로 갈수록 필체가 떨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쓰고 있는 이조차도 청색병의 마수에 집어삼켜진 것만 같았습니다. 편지를 다 읽자 수도원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수도원에 병마를 불러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대들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허나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수도원을 지켜내야만 합니다. ……병이 얼마나 이어질 것 같습니까?”

“신께서만 아시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열 명에서 스무 명, 심각할 경우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요.” 그는 내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그렇다면, 양호실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만 해도 네 명의 형제가 죽어가고 있고 앞으로 몇 명이나 더 병에 걸릴지 모르는데 그들을 언제까지고 가만히 방치해둘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도록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는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가 드디어 본론을 꺼내들었습니다. 고해성사와 종부성사. 그렇지요. 죽어가는 모든 이는 성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속세적일지언정 수도원과 사제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있는 수도원장으로서 죽어가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위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제 소임을 대신해줄 수 있는 존재인 나를 찾아온 것이고, 건너편의 방에 있는 무테이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이루어진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이건 기회였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는 양 간격을 둔 다음 짐짓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양호실로 돌아가겠노라고.

감염되지 않은 다른 이를 보낼 바에야 의학적인 지식이 있는데다 이미 A와 한참동안 함께 있었던 내가 들어가는 게 옳았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지막까지 양호실에서 병자들을 돌보다가 끝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역할! 설사 다른 의중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이 또한 분명한 나의 진심이었습니다. 대신 나는 조건을 몇 가지 붙였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병자 외에는 아무도 양호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것, 특히 M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빠져나오려고 할 가능성이 높으니 최대한 그에게는 이를 숨기고, 적어도 며칠간은 그를 철저하게 감시할 것. 만일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수도원에 남는 의학자는 그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은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습니다. 수도원장은 한참동안 고민하는 모양새였지만 그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져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연신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며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의 죄악감과 책임감을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수도원과 내가 사랑하는 벗들과 형제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또한 일종의 도박이었고 그 판돈은 나의 목숨이었으나, 그 정도야 기꺼이 내바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독단을 알게 된다면 무테이는 분명 분노하겠지만, 그 또한 감내해야 하는 일. 그도 언젠가는 나를 이해해줄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를 영영 떠나보내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수도원장과의 이야기도 끝난 이상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해가 뜨기 전 서둘러 어둠에 몸을 숨기고 양호실에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방치된 환자들로부터 기원하였을 지독한 악취가 폐부를 찔러 들어왔습니다. 나는 코를 틀어막은 채 재빨리 방의 중심부로 들어가 숨겨둔 L의 원액을 꺼내어 복용하였습니다. 잠시간 목부터 복부까지 이어지는 내부에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 외에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좋은 징조였습니다! 적어도 실험에 희생된 쥐들처럼 몸이 뒤틀리거나 바로 죽어버리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경과를 지켜보는 일 뿐이었습니다. 시간을 벌어둔 며칠간 살아남는다면 성공, 죽어버린다면 실패였지요. 불길과도 같던 고통이 한결 가시자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더러워진 양호실을 정리하고 병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고름과 오물을 닦고 향을 피우자 서서히 양호실을 가득 채우던 악취가 잦아들었고 새로이 들어온 두 수사도 헛구역질을 멈추고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들의 몸을 살피자 두 사람 모두 청색병에 걸렸음을 증명하는 목과 사타구니 등지의 자그만 종기가 보였습니다. 그 옆의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A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하루사이에 비쩍 말라 있어 인간보다는 시신에 가까워 보이더군요. 종기는 육신의 모든 기력을 빨아들인 듯 사과만큼 커져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그는 하루도 채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에게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열어주기 위해서는 L을 복용시키는 게 옳았겠으나 당시의 나는 어쭙잖은 동정과 두려움에 현혹되어 망설이고 말았습니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그곳에 발을 들인 주제에, 터무니없게도 정작 손을 쓸 때가 되어서는 덜컥 겁을 먹어 범인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지요! 결국 난 다시 L을 원래의 장소에 보관해두었고 A에게는 양귀비 유액을 마시게 한 다음 칼로 종기를 째는 데에 그쳤습니다. 종기에서는 악취가 나는 고름과 함께 핏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을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A는 아편에 취해 아무런 비명도, 말도 내뱉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째서인지 이전의 지독한 악취를 맡으면서도 느껴지지 않았던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몇 명의 병자가 더 들어왔습니다. 그 후로는 내리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발작이 발생하면 몸을 단단히 묶어 저지시키고, 버드나무 껍질이나 양귀비의 말린 잎을 달인 물을 마시게 한 다음 종기를 째고, 형제들의 정신이 맑아질 즈음에는 성사를 집전해주었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어떤 시간이든, 어떤 날이든 양호실을 가득 채운 병자들은 고통 속에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 목숨의 무게만큼의 무력감이 더해졌습니다.

역병의 첫 번째 피살자는 당연하게도 A였습니다. 그는 종기를 째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청색병에 걸린 이는 어떻게든 죽을 수밖에 없었고, 격리를 위해 하루 동안 그를 방치하도록 한 것도, 부풀어 오르는 종기를 절제한 것도 당위적이었으며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죽음에 책임을 느꼈습니다. 끔찍한 기분이었지요. 그나마 그가 느껴야 했을 고통을 경감시켜주고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집전해준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기위안을 삼고자 했지만 나 자신조차 제대로 설득할 수 없더군요.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시신과 마주앉아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 주여, 영원한 안식을 내리소서, 사라지지 않는 빛을 비추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주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그 후로도 죽는 이가 나타날 때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기도를 되뇌었습니다.

한밤중, 모두가 잠에 들었을 무렵 나는 A의 시신을 끌고 나와 뒤편의 묘지에 묻어주었습니다. 첫 번째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영예 아닌 영예를 누린 덕분에 그에게는 묻힐 만한 장소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명을 더 이곳에 묻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의 악몽이 천천히 현실로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현실은 꿈보다도 몇 배는 더 지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언제나 더 많은 병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사망자가 묘지로 빠져나갔습니다. 그 오고가는 이들의 얼굴 중에 무테이가 없다는 사실만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제 완전히 격리된 양호실에서는 벗의 소식은 물론이고 외부─수도원의 전체적인 상황 자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따금씩 그곳이 수도원과는 아예 다른 장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정도였지요. 새로 들어오는 병자들이나 가끔씩 가까이 다가오는 보초들에게서나 바깥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바깥의 수사들도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역병에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병자 스스로는 물론 친밀한 형제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그걸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던 이가 있는가 하면, 한참동안 그가 묻힌 묘지를 서성이며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 흘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끔찍한 역병은 사람들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조차 파괴하며 이 수도원을 내부부터 천천히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무테이의 상황은 닷새째 3시과가 되어서야 새로 들어온 수사에게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격리 상태이지만 발병의 기미는 없으며, 본인의 계속된 항의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격리가 해제될 것으로 보인다더군요. 나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몰라도 이곳저곳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림짐작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수도원장이 그를 며칠이라도 더 붙잡아두기를 바랐습니다. 언제까지나 그와의 재회를 피할 수는 없었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 전에 추가적인 실험을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A의 죽음을 시작으로 연이어 사망자가 발생하자 양호실의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완전히 절망에 빠진 병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해 공황이나 착란에 빠지거나, 생에 대한 의지를 잃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전자는 고통과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다가 지쳐 쓰러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심한 착란에 빠져 벌떡 일어나 문이나 창문으로 돌진하거나 나를 공격하려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후자는 이따금씩 고통과 착란으로 발작을 일으킬 때를 제외하면 마치 시체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겨우 들리는 기도와 암송 소리만이 그들의 생존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침통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혼란과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실하던 이가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주를 저주하는 말을 쏟아내는가 하면 주기도문만을 하루 종일 암송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도 평소의 인품을 잃지 않고 순순히 안식을 맞이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몇 번의 죽음을 겪고 나서야 나는 겨우 눈앞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재앙에 대적하고자 한다면 범인의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그 새롭지 않은 깨달음을 그제야 진정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서둘러 병자들에게 희석농도를 조절한 L의 개량약을 복용시키기 시작했고, 온갖 마술적인 조치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러했듯 나의 신앙도 역병을 겪으며 완전히 짓밟혀있었고 그 자리를 불온한 상상이 메웠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이들에게 내세란 환상에 불과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현세뿐, 그러니 죽음은 곧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끝이라는 상상. 그것이 나를 떠밀었습니다. 이제 망설임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칼을 들고, L을 투여하고, 화덕에 불을 올렸습니다. 신이 우리를 버렸다면 남은 것은 인간의 방법뿐이었지요, 고통,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치유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으며─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이 열망이 죄라고 한다면, 이것을 품은 이의 말로가 저주받는 것이라면, 그 또한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일주일,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사망자는 다섯 명, 병상 위의 병자는 열두 명에 이르렀습니다. 수도원 전체의 3할 가량이 벌써 병에 희생된 셈이었지만 그나마도 엄격한 격리로 통제된 결과임이 명백했습니다. 역병은 잠시 주춤할지언정 완전히 사그라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종식은커녕, 이제야 시작된 셈이었지요. 꾸준히 늘어나는 병자의 수를 양호실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독방에 있던 침대를 옆쪽의 창고로 옮겨와 그곳에 병자를 수용해야만 했습니다. 치료와 연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습니다. L의 복용을 시작했지만 그 예후가 완전히 들쭉날쭉하더군요. 동물들에게 투여했을 때처럼 눈에 띄는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덩달아 약효도 모호했습니다.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했지만 L을 투여한 이들 중 어떤 이는 오히려 병의 진행이 빨라져 수 시간 만에 사망하는 반면 어떤 이는 증상과 고통이 상당히 완화되어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또 다른 실험체인 나도 살아남은 상황이니, 더 많은 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다면 온전한 L을 만드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완벽한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병자가 필요하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였는지요.

열흘째가 되는 날의 밤에는 두 수사가 머지않은 간격을 두고 사망했습니다. 각각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사망자였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한 기도를 바친 다음 침상에서 시신을 끌어내렸다가 한밤중이 되어서 묘지로 데려갔습니다. 그즈음에는 묘를 파고 시신을 묻는 데에도 익숙해져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묻고 무덤가를 잠시 서성이다 되돌아오던 중 누군가가 갑자기 어둠속에서 나타나 내 멱살을 움켜잡았습니다. 당황하여 횃불을 놓친 바람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곧바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습니다. 무테이였습니다. 오랜만에 벗을 만나니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그보다도 당혹감과 걱정이 우선했습니다. 나는 짐짓 넉살을 떨며 말했습니다.

“이런, 무테이. 이 정도 힘이라면 건강한 모양이네. 참으로 다행이야! 격리는 해제되었나? 하지만─보초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그는 내 말을 듣고는 내던지듯 멱살을 쥔 손을 풀었습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나는 방금 전 횃불을 놓친 것을 몹시 후회했습니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눈치였습니다. 분을 삭이는 듯한 숨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집어치워. 이게 다 뭐하자는 짓거리야? 병자들과 함께 스스로를 가두고는, 죽음의 고통을 나누기라도 하려고? 성자 노릇이라도 하려는 건가? 순교자가 되고 싶어? 이거 놀라운데! 칭찬이라도 해주면 만족하겠나?” 말의 사이사이에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것이 냉소적인 비아냥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선명한 분노를 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진정하게, 무테이.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 입 다물어.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지?”

“그럴 리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그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싸늘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나도 절로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네. 무테이, 결국 해답은 L뿐이라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잖나. 테오도르, 그는 진정 신의 선물이더군! L만 이용한다면 역병은 물론이고─ 설사 상대가 악마라 하더라도 승산은 있을 거야.”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아직 L은 완성하지 못했잖아. 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그대로 투여했을 때 무슨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 무테이는 흠칫 말을 멈추더니 아연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새 내 의중을 꿰뚫은 모양이었습니다. “너, 설마.”

“그래, 이미 실험은 끝났네! 대상은 나였지. 봐, 살아남았잖아! 아무런 부작용도 없어. 지난 몇 주간 반쯤 밀폐된 공간에서 몇 명이나 되는 병자들과 함께 있었네. 발병하지 않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지. 이건 L의 효과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 물론 인자를 충족한 나나 자네가 아닌 형제들에게 원액을 그대로 사용하는 데엔 무리가 있을 테니 더욱 정밀한 실험과 개량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자아, 그러니까 무테이.”

나는 품에서 약병을 꺼냈고 그에게 다가가 그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색의 액체─L이 담겨있었지요. 무테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 손 위에 놓인 약병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안전성은 이미 검증했어.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은 이상반응이 자네에게서 발생할 리는 없겠지. 병의 마수에서 해방되면 그대도 함께 병자들을 돌볼 수 있을 테고, 연구도 다시 진행할 수 있을 거야. 좋은 일이지 않나? 그러니 부탁이야. 내가 보는 앞에서 마셔주게. 그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아.”

“허.” 그는 그제야 입을 열고는 조소했습니다. “아, 그래. 마시지 않는다면, 강제로 먹이기라도 할 텐가?”

“무테이!”

타이르듯 이름을 부르자 무테이는 찌푸린 낯으로 나를 일별하더니 약을 마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다른 병자들에게는?” 그가 빈 약병을 나에게 던지며 날카롭게 물어왔습니다. 이제와 그에게 무엇을 숨길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희석한 형태로 여섯 명 정도. 경과가 나쁘지 않아! 아직까지 치료는 불가능하고 다소 불규칙한 예후를 보이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부작용은 줄어들고 약효는 늘어나고 있네. 분명, 고지가 머지않았어.”

“너는──”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하는가 하더니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고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습니다. “아니, 됐어. 지금은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고개를 돌려 수도원의 본관으로 돌아갔습니다.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뒤돌아보지 않더군요. 나는 한동안 그가 떠나간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이에게 말도 없이 내 독단을 밀어붙인 이상 마찰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막상 눈앞에 실제로 닥쳐오니 예상보다도 훨씬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걱정하던 일은 피할 수 있었으므로.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또한 신의 사랑을 받는 이로서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나나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처음부터 역할이 주어져 있었고 그것에 다다르지 않는 이상 어떤 위험도 그를 쉽게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와 함께 A를 부축해왔던 두 수사는 이미 묘지에 묻혔건만 L을 투여 받지도 않은 상황에서 아무런 증세도 없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증명이라 해도 무방하겠지요. 허나 그럼에도 두려웠습니다. 그 모든 것이 헛된 예측일 뿐이라면, 그도 다른 이들처럼 죽어가게 된다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차라리 내가 먼저 죽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홀로 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종이 울리는 것을 듣고는 다시 양호실을 향해 걸음을 떼었습니다. 가장 큰 위험에서는 이제 벗어났고, 방금 전의 일은 단순한 마찰일 뿐이었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 후 며칠간 무테이는 본관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명의 수사가 더 죽어가고, 또 몇 명의 수사가 양호실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열 번째 희생자를 묻을 때에서야 무테이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